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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사람이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생각하며 거기에 따라 온갖 수고와 노력을 하는 것을 중단하고 단지 성령께서 그를 이끄시는대로 조용히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단지 '행함(행동)'이지 수고와 노력(일)은 아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않고 다만 조용히 성령을 따라가는 것은 이전에 바쁘게 일을 하던 '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죽기 전에도 사람은 아담의 타락 후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였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에 열매를 맺지도 못하면서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던 모든 열심과 노력은 내려놓고 오직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일의 주체가 내가 아니고 성령이면 나는 무엇을 하는가? 몸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일을 하고 마음은 안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일을 안하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일인데 일을 안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일을 하더라도 일의 계획과 추진을 내가 하지 않고 하나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것이다. 계획은 일의 시작이고 기초이며 추진은 일의 진행이다. 이것을 내가 하지 않으니 실제로 일을 내가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먼저 일하도록 지으시지 않고 먼저 안식하도록 지으셨다는 사실을 항상 주목해야 한다. 일은 나중이다. 그것은 안식 후에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들이 한 주일 곧 '일월화수목금토'라는 7일 단위를 살면서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하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오늘 주일 집회부터 하고 한 주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토요일이 주말인 것은 알지만 일요일이 일주일의 첫날이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월요일을 한 주의 첫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월요일이 아니라 오늘(일요일)이 첫 날이다. 그런 일요일에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삶을 시작하기 전에 안식부터 누리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천지창조 때 사람이 지음 받자마자 안식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 중 4계명을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나자 마자 안식에 들어간 이 사실 곧 사람은 그 삶을 위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이미 다 조성해 놓으신 환경에서 안식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이 사실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제7일을 안식하는 날로 지내도록 명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성령님은 그 백성들로 하여금 한 주간의 끝 날(토요일)에 육신이 안식하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제시하셨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날이 다 안식의 날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특별한 안식의 날을 주시지 않고 대신 한 주간의 시작일인 주일(일요일)에 그리스도를 찬송하며 누리는 집회를 가지게 하셨다. 이것(일요일에 집회를 가지는 것)은 초대교회에 의해 형성된 습관이지만 결국은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조성된 습관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오직 그 생명으로 행하도록 환경을 조성하신 것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한 주간의 삶을 주님 안에서 안식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매사에 생각부터 하거나 일부터 하지 않고 주님을 믿는 것부터, 주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을 듣는 것부터 하는 것이다. 무슨 일에서든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는 죽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매사에 그리스도를 믿고 조용히 안식하는 것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도 말했지만 이런 점에서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 외형상 특히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고 조용히 안식한다는 것은 자아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에 다름 아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은 결국 '나'의 죽음이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메마른 광야뿐이다. 눈에 보이는 환경만 볼 것 같으면 안식을 가지기는 매우 어려운 환경인 것이다. 믿음이 없는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마음에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가득해서 그 마음의 고통이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실정이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이런 상황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간단히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인내가 필요하다. 참으로 성도의 인내는 기다리는 인내이다.

성도의 인내가 기다리는 인내라면, 성도의 안식은 기다리는 중의 안식이다. 모든 것을 받고 난 다음에 안식하는 안식이 아니라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인내하며 약속을 기다리는 중에도 걱정과 불안과 근심이 없는 그런 안식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눈에 보이는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은 그의 때를 기다릴 줄 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다면 그들은 늦어도 이 주일 안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고 믿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시내산에 그들을 붙들어놓고 약 일년의 시간동안 그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38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뱅뱅 돌게 하시며 하나님 믿는 것을 배우도록 가르치셨다. 믿을 줄 모르고 인내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긴 시간동안 약속의 실제를 누리지 못한 채 더 긴 시간을 억지로 인내하며 하나님께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좋지 못한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의 모든 생각이 즉각 실현될 때만 안식할 뿐 조금이라도 그것이 지연되거나 좌절되면 안식하지 못한다. 믿음이 있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항상 안식을 누리지만, 믿음이 없어서 오직 자기 생각과 자기 육신의 능력대로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은 항상 그 마음과 행동이 분주하며 안식이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벌을 주거나 그의 일을 방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정함이 없고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성령을 좇지 않고 자기 생각을 좇는 사람은 오늘은 이것을 원하다가 내일은 저것을 원한다. 자기도 내일 자기가 어떻게 바뀌며 자기 생각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동쪽으로 가고 싶고 동시에 한편으로는 서쪽으로 가고 싶은 것이 정함 없는 육신의 생각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이 다 성취되겠으며 설사 하나님이 그에게 축복을 하셔서 소원을 성취시켜 주고 싶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들어주어야 할지 정함이 없으니 어떻게 그렇게 해 주시겠는가? 그러니 문제는 사람의 어리석음과 허망한 생각 자체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하는 이유 곧 내 생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주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하며 또한 끊임없이 사탄에게 방해를 받고 있음으로 해서 스스로 합당한 인생 설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싶은 사람은 인생의 창조자시요 인생의 최고 운영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의지, 그 믿음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일이 되든 안되든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고통 속에라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기다리는 선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약속을 유업으로 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의 최고의 일은 참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모세가 40세부터 80세까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의 기준에서 볼 때) 하는 일 없이 양이나 치고 살았던 것은 그 다음 40년(다른 사람들 같으면 무덤에 들어가 있어야 할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시간 곧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도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인격적 육신적 자질을 함양하는 시간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다리는 시간은 무의미 한 것이 아닌 것이다.

요셉에게 있어서 애굽으로 팔려간 17세 이후부터 총리가 된 30세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고난 속에서의 기다림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에게 주어진 꿈(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 기다림이 고통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믿음 중에 하나님이 그의 고통스런 현재 환경 속에서도 늘 함께하심으로써 그를 형통케 하시는 것을 체험했다. 종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종들 중의 두목이 되고 수감 생활이라는 환경에서 긴 시간 동안 벗어나지 못했지만 죄수 중의 총무가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약속의 그 날이 오기 전에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순간순간 함께하시며 위로하신다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약속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이러한 삶 곧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살만한 것이다.  


둘째,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복종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내려놓는 차원에서의 복종이다. 이것은 어떤 결단의 문제이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는 것은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되지만 어떤 때에는 의지와 결단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육신은 육신의 영광과 안락을 잃지 않으려고 강력하게 저항한다. 거기에 사탄의 공작과 부추김도 있다. 그러므로 육신은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육신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육신의 요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요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성령의 부담을 따라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도 결국은 행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행동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리고 몸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요 결단의 문제다. 행함은 행함인데 내 생각과 내 의지와 내 감정을 따라 행하는 행함이 아니라 성령의 부담을 따라 행하는 행함이다.

이것은 육신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노는 것이 아니다. 노는 것도 아니요 쉬는 것도 아니요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성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요 때로는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성령은 때로 우리로 움직이고 싶지 않을 때 움직이게 하시고 때로 우리가 움직이고 싶을 때 가만히 있게도 하신다. 많은 경우에 성령을 좇는다는 것은 육신의 욕망(정욕)을 따라 몸이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몸이 움직이느냐 안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몸이 성령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느냐 아니면 육신 자체의 요구에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다. 육신이 자기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는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과 무력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육신의 종이 아니요 하나님의 종이므로 몸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위치는 성령님 앞에 대기하는 것이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가르친 대답 곧 "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겠습니다" 하는 것이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14:4)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4:7-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생기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것과 같이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끝마치셨으므로, 그 때로부터는 안식이 있어 온 것입니다. 일곱째 되는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하나님께서 일곱째 되는 날에는 그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 하고 또 이 곳에서는 그는 다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먼저 들은 사람들(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치 않았으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떤 날을 정하시고 이미 인용한 말씀대로, 오랜 뒤에 다윗을 시켜서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다른 날이 있을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을 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히브리서 4장, 표준새번역)

이 말씀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들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은 그 지으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여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리게 하는 것이다. 천지는 하나님이 다 창조하신 것이고 사람의 생명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이미 이루신 역사 안에서 이미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믿고 누리는 사람은 그 인생이 평안하고 안식을 누리는 인생이 되고, 반대로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해서 자기 삶을 꾸려가야 하므로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것이다.

아담의 실패 후 하나님은 일부의 사람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이 안식을 누리게 정하셨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날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식을 받아 누리도록 예정된(거기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 안식에 들어가는데 실패했다. 그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이다. 약속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물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데 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믿음의 실패는 곧 인생의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믿음이 없는 그들은 어떤 점에서 애굽보다 못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들은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편이 나았을런지 모른다. 이것은 얼마나 참담한 결과인가!

그들은 왜 광야로 나왔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복지(하나님의 안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지나가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복지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온갖 고통과 곤고함(특히 불안과 답답함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겪다가 거기서 죽고 말았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것을 예비해 놓고 그리로 이끄실지라도 결국 그것들을 누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이전의 세상 삶보다 더 괴롭고 곤고한 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믿음이란 결국 들음에서 나는 것이므로 관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깊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며 그리로 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날선 칼과 같이 예리한 것이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얼마든지 사람을 일깨우며 변화시키는 역사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는 들으나 진실로, 그리고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 많은 고통과 실패와 곤고함 속에서도)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높고 교만하여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들이 (진리를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사탄에게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실체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 이것은 큰 복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지 모세의 약속을 듣고 광야를 지나간 것보다 훨씬 좋은 환경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누리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안식의 실체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이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누려야 한다. 그리고 이 누림은 곧 자기 일을 내려놓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을 내려놓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가 내 사정과 형편을 아신다는 것을 믿고 그의 승리와 도움을 붙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거나 그것과 상충되는 모든 나 자신의 생각과 수고와 노력과 염려를 내려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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