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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까지 우리는 육체의 일 곧 사람이 그 육신(의 생명)대로 살 때 필연적으로 맺게 되는 열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육체의 일은 탐욕과 그로 인한 범죄이다. 육체의 일이란 곧 '망상을 좇아 허무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을 슬프게 하며 또한 자기 생명을 죽인다.

사람은 왜 육신의 종이 되어 이런 허무한 일을 하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즉 불신앙이 그 원인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이 없고 영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육신)은 통제자를 잃어버렸고 인도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불안과 망상과 허무한 생각(탐욕)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침내 사람을 음행과 호색과 술 취함과 방탕에 빠지게 하고 우상 숭배와 점치는 것과 마법에 빠지게 하며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원수 맺는 것과 화내는 것과 다툼과 분열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육체의 생각대로, 육체의 욕구대로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 마음의 소원이 어떻든 상관없이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결국 그 욕심, 그 허무한 생각을 따라 범죄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며(롬3:23)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육신대로 사는 것은 단지 반(反)하나님적이고 반(反)진리적일뿐 아니라 반(反)생명적이고 반(反)육신적이다. 자기 생명을 좀먹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육신대로 사느냐 영을 좇아 사느냐 하는 것은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이래도 저래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오염된 물을 마실 것인가 깨끗한 물을 마실 것인가 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육신을 따라 살 것인가 영을 따라 살 것인가 하는 것도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 그 삶이 삶도 아니게 된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위협도 아니고 권고도 아니고 다만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꼬임과 모든 고통이 다 육신대로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특히 아들의 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육신대로 살면 그 삶은 고통과 사망으로 점철될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면서 오늘은 성령의 열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정상적인 열매들에 대해 말한 곳은 여기 외에도 여러 군데가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4-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3:17,18)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5:9)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4:8)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전1:5-7)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딤전6:11-18)

이런 말씀들은 표현은 달라도 다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말씀들이다. 이 말씀들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은 믿음, 소망, 사랑, 의, 진실, 겸손, 온유, 착함, 깨끗함, 인내, 영생을 추구함, 지식(진리의 말씀을 추구함), 선행 등이다. 이 내용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믿음과 소망과 의와 영생과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인 열매들이다.

믿음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고 의와 진리와 생명을 추구하는 삶이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영생(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 생명을 향한 열망, 이것이 바로 성령에게 사로잡힌(영을 따라 사는) 사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요 열매이다.

그 다음은 그러한 믿음과 소망, 그러한 '생명을 향한 열망'이 그것을 가진 사람 안에서 빚어내는 열매들이다. 믿음과 소망과 생명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믿는 내용대로, 소망대로, 그가 취한 생명대로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령을 몸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있어서 성령은 실제로 주인이시다. 그는 사람을 그 육신의 본래 성품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그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며 그 마음을 따라 살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품성을 따라 거룩한 사람이 된다.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들 중 두 번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된 인격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결국 영의 열매이며 (아들의) 생명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어느 때에 성령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일상 삶에서 항상 영을 좇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이러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영이 있느냐 없느냐가 궁극적인 문제가 아니고 영을 좇느냐 육을 좇느냐 하는 것이 궁극적인 문제이다. 제 아무리 영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영을 좇지 않고 육을 따라 산다면 육신의 열매밖에 맺지 못한다.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바울이 이러한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하니 이런 생활을 하라는 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즉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의 증거, 성령을 받은 사람의 모습은 이렇다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나타낸다. 성령의 열매란 성령의 일 곧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성령의 열매는 결국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궁금하게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며 어떻게 처리하실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말씀하시며 우리로 어떤 느낌을 갖게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영(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낄수 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으로서 땅에 계셨던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자 하면 주 예수님을 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자 하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 된다. 우리 안에서 어떤 생각을 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시며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을 나타내게 하신다. 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밖으로 드러낼 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형제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있으면 된다. 그들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 육신을 이기고 무엇인가를 해 나가는 것을 보면 된다.

그렇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분이다. 우리가 성령의 가르치심과 감동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주님에 의해 배우고 감동된 지금 이 우리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는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분이며 사람과 만물을 사랑하셔서 따뜻하고 부드럽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며 범사에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분이시며 화평을 도모하는 분이시며 그것을 위해 그 택한 자에게 오래 참고 기다리는 분이시며 선과 의와 진리와 거룩을 도모하시는 분이시며 그 자신의 원칙과 약속에 대해 그리고 그 택하신 자들을 향해 성실하고 미쁘신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역사할 때 당연히 그 분 안에 있던 특징들이 사람 안에서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로 꼽히는 사랑과 평화와 선과 인내 등은 사람 안에 있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영생(영원한 생명, 인격)의 표현이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언급한 몇 가지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랑(love)
사랑은 한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의 큰 특징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사랑은 모든 선한 성품의 종합이요 근원이다. 모든 덕목(德目)이 여기서 나오며 이리로 돌아온다. 사랑은 곧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 그러므로 누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밖에 없으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흘려 내 보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이며 아끼고 귀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이나 육신적인 차원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남녀가 사랑하는 것이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든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든 정도의 차이일뿐 다 본질은 좋아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는 것이다.
성령을 좇는 사람은 이 사랑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그 사람 안에 사람을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보고 자기와 한 몸이며 형제라고 보는 시각이 생긴다는 것이며 그를 자기 몸처럼 아끼고 귀히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희락(喜樂, joy, 기쁨)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또 다른 현저한 특징이다. 이 기쁨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쁨이 있다는 것은 곧 이 사람 안에 자기의 생명과 삶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복된 선물이라는 생각 및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따라서 내가 처한 모든 삶의 순간과 여건들은 다 나를 유익하고 복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모든 삶과 모든 일은 다 그 안에 충분히 즐기며 누릴만한 내용이 있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화평(평화, 화목, peace)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람과 싸울 일이 없고 오직 같이 있고 같이 살고 싶어하게 된다. 그리고 같이 살려고 하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며 양보하며 상대방에 대해 오래 참으며 부드럽게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툼과 분열이 생기지 않고 화평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오래 참음(참을성이 많음, patience, longsuffering)
이것은 곧 육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는다는 것은 육신이 괴로워하는 상태를 어떤 목적을 위해 한동안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 내지 어떤 상황에 대해 일정한 믿음과 소망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즉 얼마간 참으면 참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결과보다 나은 결과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그것을 소망하며 참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있고 또한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바라는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약속이 없다면 그래서 믿음과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참지 않을 것이며 참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참아도 아무리 기다려도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누가 오래 참고 기다리겠는가?  

오래 참음은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사람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환경에 대한 것이다. 먼저 사람에 대한 인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성령 안에서 살 때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오래 참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오래 참게 된다. 그것은 우리 안에 그 사람을 보는 특별한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내게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 사람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으로 인해 그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냥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믿고 바라며' 견디는 것이다.(고전15:7)
그러나 참음은 믿음과 소망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랑에서도 오는 것이다. 즉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에 대해 (하나님이 나를 귀히 여기시는 것처럼 그도 귀히 여기시며 따라서 그 사람도 장차 온전케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 생기게 되며 그러한 믿음과 소망으로 인해 그에 대해 오래 참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순서를 바꾸어 말해도 마찬가지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게 되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빛 가운데서 사람을 귀히 여기며 사랑하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빛에 의해 사람의 가치를 알게 되고 또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면 나뿐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서도 믿음과 소망이 생기게 되며,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으면 그를 사랑하게 된다. 또 사랑하게 되면 자연히 참고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는 별도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화평의 마음, 믿음과 소망의 마음이 있을 때 자연히 따라 오는 것이다.

자비(친절함, 다정함, kindness, gentleness)
자비는 여덟 번째 나오는 열매인 온유(부드러움, 유순함, gentleness, meekness)와 사실상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양선(良善, 착함, 선량함, goodness)
이것의 의미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자비나 온유와 마찬가지로 '사람 좋음'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선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충성(성실하고 믿음직함, faithfulness)
양선 또는 자비와 온유가 '사람이 좋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충성은 사람이 좋을 뿐이 아니라 '책임감도 강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냥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과 목표 의식이 분명하고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이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고 저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인 식으로 덮어놓고 좋은 것이 아니라 방향성이 분명하고 귀속성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그 진리, 그 의와 거기에 속한 형제들에게는 한없이 좋고 한없이 열려 있고, 반면에 마귀와 그 거짓말, 그 종들에게는 분명하게 적대적이며 닫혀 있는 선명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충성이고 성실이고 신실함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일을 맡긴 사람에게도 열려 있고 그 일을 반대하며 방해하는 사람에게도 열려 있다면 그것은 그저 사람 좋은 사람일지는 모르나 충성스럽고 성실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맡길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일할 사람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에게 의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도록 역사하신다. 이것은 곧 불의와 거짓을 대할 때는 단호히 거부하고 대적하도록 요구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며 오래 참고 용납하며 기다릴 때는 그렇게 하더라도, 어느 상황, 어느 때에는 선을 분명히 긋고 태도를 선명히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것이 잘 되는 사람이 바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저 사람만 좋은 사람이라면 그는 육신에 속한 사람일뿐이다.

절제(자기 통제, 자기 부인, 육신의 욕망을 쳐서 복종시킴 ; self-control, temperance)
절제가 성령의 현저한 열매인 것은 성령과 육체가 서로 대적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육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그렇기 때문에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영이 육체의 욕심을 누르고 다스림으로써 그것이 몸밖으로(삶 속에서)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절제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이 절제는 육신이 그 자신(육신)의 욕망을 스스로 억지로 누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영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욕망이 통제되고 영의 욕구가 관철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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