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육체의 일 (3) (갈5:19-21) / 2002. 12. 15

2010.05.03 10:04

이상봉 조회 수:433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지난 주까지 우리는 육체의 현저한 일 중 두 가지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에 대해서와 생활의 염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우상 숭배와 술수를 의지하는 일에 대해서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을 내는 일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우상 숭배와 술수이다. 사람은 왜 우상을 숭배하는가? 그것은 그것이라도 숭배해야 하기 때문에 숭배하는 것이다. 우상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에 있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지 공연히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상을 숭배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사람에게 우상이라도 숭배하지 않으면 안되는 한심하고 딱한 사정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본디 우상 숭배의 문제는 이방인에게는 없는 것이고 (그들에게는 아예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의지할 하나님이 없다면 몰라도 하나님이 있는데 왜 이스라엘은 그렇게 줄곧 우상을 숭배했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고 선지자들을 통해 경계하고 경고하고 책망과 징계를 내렸어도 끝까지 우상 숭배를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우리로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이 있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 보면 그들도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 사람이었고 오늘 우리가 하는 일과 마찬가지의 일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특별히 우상을 숭배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하나님을 배반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무슨 종교 생활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생존을 하려고 했고 생활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 대신 술수(마법)를 의지하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생활은 간단히 말하면 환경은 험하고 인간은 약하므로 범사에 신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생활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기계를 의지하고 과학과 기술을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겨울이 오면 독감을 걱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예방 접종을 하며 비타민을 먹는다. 오늘날 가볍게 여기는 병도 과거에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지금도 많은 병들이 그대로 방치하면 물론 목숨을 잃게 된다. 당연히 고대 사람들도 그런 문제에 직면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우리가 하는 것처럼 그런 것들을 예방하기 위해 자기들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이 바로 신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독감예방 주사를 맞고 병원에 가서 치료 주사를 맞는 것처럼 그들은 병이 나기 전에 그리고 병이 든 후에 신을 의지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생활을 위해 한 것이다.

문제는 그 신이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다. 바알을 숭배했고 기타 우상을 숭배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섬기려는 욕망에 항상 사로잡혔다. 그 결과 무언가 감각할 수 있는 신을 만들고 그것을 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알고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대적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편한대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자기들에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거나 우상을 숭배한다고 책망을 하는 것을 내심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기 때문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그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들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모세를 통해서만, 그의 말씀을 통해서만 그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라고 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을 영으로(영을 통해) 알고 영으로 섬기지 않고 육체대로 즉 눈에 보이는 대로 육체의 감각대로 섬기려는 태도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우상 숭배 문제의 본질에 대해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다. 우상 숭배의 본질은 {불신앙}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말씀, 그 약속만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붙잡으려는 태도가 바로 우상 숭배를 가져오는 것이다.

누구나 불안하고 두려우면 무엇인가를 의지하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불안 가운데서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다른 대안을 찾게 되며 그것이라도 의지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목사를 의지하며 눈에 보이는 기적과 표적을 의지하는 신앙에 빠져 있다. 이것은 각도를 달리하여 보면 우상 숭배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성령과 말씀, 성령과 교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현재의 방식이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가시적 방법은 교회이다. 말씀이 그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믿음의 형제들은 살아 있는 말씀이며 땅에 있는 하나님이다. 그를 사랑하며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지하는 것이다. 그밖의 다른 방법은 다 잘못된 것이며 우상 숭배와 같은 것이다.


이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3)

육신의 현저한 특징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시기하며 분내며 다투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다른 어떤 육적 행위보다 이 시기와 다툼과 분열을 첫째가는 육적 행위로 꼽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와 다툼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약4:2) 그에 의하면 시기는 욕심에서 온다. 그리고 욕심에서 나온 다툼과 시기는 결국 살인으로 발전한다.

그렇다면 욕심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서 거짓되고 허망한 생각을 품은 데서 온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허락하지 않은 어떤 것을 내가 지금 기어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욕심을 품는 것이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가지려는 마음은 욕심이라고 하지 않는다. 정당한 소망, 정당한 욕망을 품는 것은 생존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뜻이 없고 소망이 없고 열망이 없으면 일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그 뜻과 소망과 열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니 문제인 것이다. 뜻과 욕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우리 마음에는 일의 진척과 관계없이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불안과 초조와 염려 및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물며 일을 위해 범죄하고 살인하는 일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의 욕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시기와 다툼과 분열과 살인이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체의 현저한 일 중 하나인 미움, 시기, 다툼(분쟁)과 분열의 현상은 바로 욕심 곧 허망하고 허무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그 생각이 잘못되면 할 필요가 없는 일, 해서는 안될 일을 하게 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사실상 아무 타당한 이유도 소득도 없는 헛된 일이었다. 그런데 왜 했는가? 그것은 그가 사탄에게 속아서 헛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인의 일은 단지 나쁜 일이 아니라 나쁜 일이기 전에 헛되고 거짓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가인이 단지 악을 행한 것보다 악을 행하기 전에 먼저 사탄에게 깊이 속았다는 사실에 대해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된 것이 가인에게 손해가 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 상식과 감정에는 이미 그렇다고 생각하는 생각이 새겨져 있다. 내 일은 실패하고 잘못되었는데 옆의 사람의 일은 성공하고 잘 되었다면 당연히 그 사람에 대해 시기의 마음이 생기고 화가 치밀고 미워진다는 것이 우리 육신의 생각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우리 생각에 그런 것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사실 따져보면 내가 잘못한 것을 옆의 사람 마저 잘못하면 그것은 내게 손해가 될 따름이고 내가 잘못한 것을 옆의 사람이라도 잘하면 그것은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내가 잘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한 일을 옆의 사람이 잘하면 내가 기뻐하지는 않을지라도 괴로워하거나 시기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탄이 사람에게 심은 거짓말(거짓되고 허무한 생각) 중 하나는 사람이 위를 보지 않고 계속 옆을 보며 자기를 판단하고 옆을 보며 자기의 위치를 잡고 자기 영광을 정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시기와 자랑은 다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다. 위를 보지 않고 옆을 보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시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시기하며 다투게 된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14:30)

이 말씀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우리는 미움과 다툼, 시기, 분내는 것은 다 생명과 반하는 것이며 결코 내가 '살고' '기를 펴고' '속이 풀리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미움과 그로 인한 분노와 다툼은 마귀가 사람을 잡기(해치기) 위해서 사람을 속이고 공격한 공격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20:3) 이 말씀은 다툼은 미련함 곧 잘못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28:25) 이 말씀은 다툼이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제 분을 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잠29:22)

분노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정복하기 위한 마귀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7) 문제는 분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마귀에게 틈을 준다는 것이다. 분노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우리는 악한 일이나 부당한 일을 볼 때 분노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분노에조차도 마귀는 어김없이 틈을 타서 다툼과 범죄를 유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노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감정을 격동시켜 영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의 인도(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곧 마귀의 통제를 받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분을 내는 것 곧 화는 내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다. 이것은 사탄이 그 사람을 흔드는 것이며 그를 파멸시키고 범죄하게 하며 마귀의 종이 되게 하는데 있어서 기초에 해당하는 필수 과정이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너지고 자유가 다 달아난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잠22:24) 왜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이런 사람의 앞날은 이제 그 사람의 것이 아니고 마귀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분을 품는 사람의 앞으로의 행동은 (그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 마음대로 될 것이므로) 예측불가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분노는 사람의 모든 것을 흔든다.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는 순간부터 사람의 다음 일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분을 낸다는 것은 자아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상하며 죽겠다는 것이다. 왜 분을 내는가? 이것은 왜 자아가 괴로워하는가 하는 이유와 같다. 그것은 자아가 압박을 당하며 손상을 당하는 것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자아가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방어하는 것이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는 우리의 옛 생명 곧 아담에서 물려받은 우리의 육적 생명이다. 이것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는 헛되이 자기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육체는 먹고 마시고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현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큼 뚜렷한 또 하나의 특징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분을 내는 것은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육체의 욕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자아는 단지 먹고 마시고 그 생명을 보존코자 하는 욕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자기 뜻'이라는 것을 펼쳐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 생각과 내 능력에 의해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강하게 원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현시(顯示)의 욕망이며 교만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딤후3:2-5) 바울이 언급한 이 말세의 (사람들의) 특징 중에 "자긍(自矜)하며(boastful)", "교만하며"(proud, arrogant), "자고(自高)하며"(conceited, high-minded)이라는 말은 다 육체의 자기 현시 욕망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것은 육체의 현저한 일이거니와 말세의 현저한 특징이다. 자긍한다는 것은 자랑한다는 것이고 자고한다는 것은 마음을 높인다 즉 자기를 굉장한 존재로 생각하고 잘난 체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아 곧 자기 현시의 욕망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거나 손상되게 될 때 사람은 분을 낸다. 그러므로 분을 내는 것은 다 교만과 상관 있는 것이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3:10)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 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18:19)

사람이 한 번 마귀로 인해 헛된 생각을 품게 되고 그 결과로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일어나 다툼에 빠지게 되면 그 상태가 매우 견고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물리치는 최선의 방책은 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미움과 시기와 분노가 일어나고 다툼이 생기기 전에 그것을 촉발하는 마귀의 거짓말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 안에 거하고 빛 가운데 거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무엇이 내게 이로우며 무엇이 내게 해로운지, 무엇이 내 생명을 위하고 무엇이 내 생명이 참으로 원하는 것인지를 알면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즉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죽는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안된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괴롭다"는 생각이 사실이 아니고 사람을 파멸시키려는 마귀의 거짓말임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리칠 때만 우리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우리 마음의 평화와 우리(형제들) 안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1 성경의 합당한 사용 (2) (요7:17) / 2003. 3. 31 이상봉 2010.05.03 3904
50 성경의 합당한 사용 (1) (요5:39, 20:31) / 2003. 3. 23 이상봉 2010.05.03 3890
49 예수의 흔적을 지닌 인생 (갈6:16-18) / 2003. 3. 16 이상봉 2010.05.03 4286
48 십자가로 자랑함 (2) (갈6:12-18) / 2003. 3. 9 이상봉 2010.05.03 4094
47 십자가로 자랑함 (1) (갈6:11-15) / 2003. 3. 2 이상봉 2010.05.03 4108
46 낙심치 않고 끝까지 주를 따름 (갈6:9,10) / 2003. 2. 23 이상봉 2010.05.03 3925
45 영을 위해 심는 삶 (갈6:7-9) / 2003. 2. 16 이상봉 2010.05.03 4316
44 진실한 인생 (2) (갈6:6-8) / 2003. 2. 9 이상봉 2010.05.03 4047
43 진실한 인생 (1) (갈6:1-8) / 2003. 2. 2 이상봉 2010.05.03 3778
42 성령으로 삶 (4) (갈5:25,26) / 2003. 1. 26 이상봉 2010.05.03 4032
41 성령으로 삶 (3) (갈5:25,26) / 2003. 1. 19 이상봉 2010.05.03 4066
40 성령으로 삶 (2) (갈5:25,26) / 2003. 1. 12 이상봉 2010.05.03 3612
39 성령으로 삶 (1) (갈5:16-24) / 2003. 1. 5 이상봉 2010.05.03 3835
38 성령의 열매 (2) (갈5:22,23) / 2002. 12. 29 이상봉 2010.05.03 3610
37 성령의 열매 (1) (갈5:22,23) / 2002. 12. 22 이상봉 2010.05.03 5541
» 육체의 일 (3) (갈5:19-21) / 2002. 12. 15 이상봉 2010.05.03 4331
35 육체의 일 (2) (갈5:19-21) / 2002. 12. 8 이상봉 2010.05.03 4254
34 육체의 일 (1) (갈5:19-21) / 2002. 12. 1 이상봉 2010.05.03 6189
33 성령을 좇아 행함 (3) (갈5:16-18) / 2002. 11. 24 이상봉 2010.05.03 3851
32 성령을 좇아 행함 (2) (갈5:16-18) / 2002. 11. 17 이상봉 2010.05.03 3969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