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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리는 바울이 말한 바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헛된 영광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영광이 안되는데 영광이 되는 줄로 알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 첫째로서 우리는 {육신의 안락, 쾌락}을 꼽았다. 다음으로 {율법적인 삶, 종교적인 삶}을 꼽았다. 그리고 이어서 갈6:1-5에서 지적된 내용 곧 교회에서 일어난 범죄를 가지고 자기를 나타내며 자랑하는 것을 꼽았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행태 중 이 일 곧 '범죄와 실수를 저지른 형제를 판단하고 낮춤으로써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이 일은 가장 교묘한 것이다. 먼저 우리는 형제의 잘한 일이나 장점으로 인해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나 형제의 잘못한 일로 인해 비난하고 멸시하는 일은 생명을 거스르고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범죄가 일어났을 때 그 죄는 제거하고 바로 잡되 그 죄를 지은 형제는 이해하고 용납하며 짐을 서로 짐으로써 세워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거듭난 생명대로 행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 생명은 성령의 빛 가운데서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형제가 누구(무엇)인지 내가 누구(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 형제나 나나 다 사람이고 사람은 다 그렇고 그런 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이미 형제의 실수와 범죄, 형제의 허물과 약함이 곧 내 (육신) 안에 다 있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그를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며 어떻게든 그를 도와서 온전케 해주어야겠다는 부담을 안는다. 이것은 속이거나 누를 수 없는 생명의 부담이다. 우리 생명은 내가 형제의 실수와 범죄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판단하고 비난해도 그것으로 인해 내가 거룩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죄의 몸을 입지 않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또 우리 생명은 형제가 오늘 이런 실수를 했고 나는 하지 않았지만 내일 내가 바로 그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모레 다른 실수를 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영은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 앞에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의 인도를 좇고 사탄의 거짓말을 듣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형제의 실수나 허물로 인해 헛된 영광을 구하여 격동하고 투기할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생각(지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생각 속에 좋다고 새겨진 일에 대해서는 기쁘고 즐거운 감정을 나타내고, 좋지 않다고 새겨진 일에 대해서는 슬프거나 괴롭고 싫은 감정을 나타낸다. 매우 좋은 일이나 매우 나쁜 일에 대해서 감정은 요동치며 흥분하게 된다. "아니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놀랍다" 하며 감정이 격동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보고 "아니 어찌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나는 신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나는 도저히 이것을 못 참겠다" 하는 식으로 느낀다면 이것이 바로 감정이 격동하는 것이다. 벌어질 수 없는 일 곧 우리 상식과 지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면 감정은 격동하는(크게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의 죄성과 그로 인한 실수와 허물과 범죄는 전혀 새삼스런 일이 아니며 우리 자신이 매일 겪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그런 일(범죄) 자체를 좋게 여기거나 허용할 수는 없지만 그 일 행한 사람(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깊이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우리 영은 형제가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놀라거나 의아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육신은 흙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에는 아무 독자적 지각과 가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오직 생존과 육신 자체의 동물적 즐거움을 위해 행동할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 영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
우리 영은 성령에 의해 빛(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으며 우리 감정은 그러한 (성령에 감동된) 영의 지식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므로 성령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우리 영도 기뻐하고 그 영의 통제를 받는 감정도 그 일에 대해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 체계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죄인들을 사랑하고 용납하시며 그 죄와 허물에 대해 (단번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천 년을 하루 같이 인내하시며 기다리신다면 우리의 영도 지식도 감정도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해 사랑과 긍휼과 측은히 여김과 너그러운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형제가 죄를 범하고 실수와 허물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고 정죄하며 그것을 자기 의를 나타내는 기회로 삼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영(성령, 양심)의 인도를 받지 않고 마귀의 거짓말을 좇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귀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생명보다 일(행위)을 먼저 추구하도록 부추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명보다 일을 더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형제의 생명)이야 살든지 죽든지 교회의 모양과 일이 보기에 그럴듯하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모양과 행위는 이러저러해야 하는데 어떤 형제가 그것에 맞지 않는 일을 했으니 교회의 모양이 좋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부되어야 한다.' 늘 이런 식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육체를 좇아 행하지 말고 오직 영을 좇아 행해야 한다.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는지 육을 좇아 행하는지를 알고 싶으면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격동과 투기에 사로잡혀 있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면 된다. 우리 마음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평안 가운데서 항상 고요하고 평안하다면 우리는 영을 좇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둘 중의 하나이다. 고요하고 평안하든지 아니면 격동하고 분주하든지. 성령 안에만 평안과 안식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좇으면 언제나 마음이 바쁘고 요동치며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상하고 감정이 격동한다. 만일 우리가 매순간 철저히 영을 좇아 행하고 있지 않다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사람이 나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 안에는 격동과 투기가 일어나 견딜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으로부터 오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헛된 영광은 격동과 투기를 낳고 우리 삶의 평안을 빼앗아가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깊이 알게 되어 헛된 영광을 좇지 않게 된다면 격동과 투기도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고 우리 삶은 주님의 평안과 안식 가운데 처하게 될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 삶은 할 수만 있으면 아주 어릴 때부터 연습하는 것이 좋다. 세 살, 다섯 살짜리 어린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면 그 어린 아이들이 무엇을 아는가 싶은데 거기서 우리는 인간이 헛된 영광을 구하여 격동하고 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없이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 자기 영광을 확보하려고 다투며 온 힘을 그 헛된 영광을 좇는데 쏟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행태가 커지고 확대되어 어른들의 피를 부르는 격동과 투기가 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려고 하고 아내는 남편을 손에 넣으려고 힘겨루기를 하며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다. 많은 교회들 안에서도 형제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누가 더 높은 자가 될 것인가 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여 힘겨루기를 한다. 그럴 때 상대방에게서 작은 허물이라도 발견되면 그것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매일 서로 싸우고 갈등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면 단순히 양보와 이해, 조심만으로는 안된다. 격동과 투기와 갈등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격동과 투기와 갈등을 제거하려면 먼저 헛된 영광을 처리해야 한다. 주님을 알 때 우리는 무엇이 사람의 참 필요이며 참 영광인지 알게 되며 그것을 알 때 우리는 마땅히 할 일을 하게 되고 할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타락하고 범죄한 사람은 어떻게 바로잡는가? 영적인 사람이 그의 '온유한 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단순한 친절과 측은히 여김과 이해심만으로는 죄 가운데 묶여 있는 약하거나 강퍅한 사람을 바로 잡지 못한다. 영은 영으로만 접촉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만 감동하여 변화시킬 수 있다. 죄를 지으면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을 향해 무디고 강퍅한데) 더욱 강퍅해진다. 이런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지식과 가르침만으로는 그 영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으로만 사람을 감화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우리 마음이 그 사람을 깊이 알고 사랑하는 상태에 있지 않으면 안되며 강퍅한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온유함이 우리 영(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죄는 육신의 생명의 강력한 발동이다. 이것은 상당 부분 사탄의 위력이다. 귀신을 쫓는 자가 귀신이 지니고 있는 것 이상으로 강력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결코 귀신을 쫓지 못하고 도리어 당할 수도 있는 것처럼 죄와 거짓과 헛된 영광에 사로잡힌 영을 다루는 사람은 온유하고 거룩한 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리고 온유한 영과 아울러 필요한 것은 자신을 돌아보며 죄를 두려워하고 죄의 시험을 경계하는 마음 곧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손에 삶을 의탁하는 믿음의 마음이다. 이것이 사실은 온유함보다 더 앞서는 영의 속성이다. 우리 영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을 그 최고의 특성으로 삼는다.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아무도 건지거나 도울 수 없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 그리스도의 법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 곧 사랑의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법은 그 이상의 것 곧 생명의 법을 가리킨다. 사랑은 이 생명의 한 표현일 뿐이다. 주님의 생명은 우리에게 우리는 다 하나요 한 몸이요 공동운명체임을 알게 한다. 범죄한 형제도 우리 몸의 한 부분이요 나도 그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요 내 일인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아들의 생명 안에서 행한다면 이런 일은 가르칠 필요도 없이 당연히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육신대로 살고 마귀의 거짓말을 듣고 하니까 범죄하고 실수한 형제를 (용납하고 짐을 서로 져주고 하지 않고) 눌러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자신을 대단한 사람 곧 범죄하고 실수한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망상에 빠진 사람이다. 자신을 그렇게 대단한 사람, 그렇게 중요한 사람(VIP)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탄의 해로운 거짓말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의 짐을 져주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주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남의 짐을 져줄 수 있다. 몸 안에 들어 있는 지체 중 자기는 고귀하고 존귀한 지체라고 생각하는 눈이나 코 같은 것이 다른 하잘것없이 보이는 것들을 무시한다면 이렇게 얼마나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겠는가! 몸 안에서 혼자만 존재할 수 있는 지체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자기를 (형제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없을만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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