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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1.친필로 쓴 큰 글자로써 진리를 강조함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신약 성경에 포함된 바울의 편지들은 대체로 바울의 친필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에 의해 대필된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를 대서(代書)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롬16:22)
그가 친히 편지를 쓰지 않고 대서를 시킨 것은 그가 글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시력이 좋지 않다든지 마비로 인해 손이 저렸다든지 하는 건강상의 이유나 또는 그 편지를 많은 형제들이 보게 될 것이므로 좀 더 훌륭한 문장으로 글을 쓰기 위해 전문적인 글솜씨를 가진 형제에게 대필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편지 끝 부분의 인사말을 비롯한 일부 내용은 자신의 손으로 친히 쓰기도 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골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살후3:17)

그런 그가 단순한 인사나 문안도 아닌 내용을 친필로 큰 글자로 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이 말하는 '큰 글자'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이 말은 '큰 글' 즉 글자체(서체)가 아니라 글의 내용이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말은 '긴 글'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최초 서신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서신들 곧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에 비해서는 짧지만 당시에 통용되던 일반적인 편지에 비하면 매우 긴 이 편지는 큰 글(긴 글)이라고 일컬어질 만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여기서 말하는 큰 글자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인 6:11-18에 담긴 내용과 글씨를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울은 이 부분을 대필자의 손을 빌지 않고 직접 썼으며 따라서 그 글씨는 매우 컸다는 것이다.

바울이 쓴 글씨가 매우 컸다는 것은 그의 시력이 약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갈4:13-15, 고후12:7-9)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이 자기 몸에 있다고 말한 육체의 가시 또는 사탄의 사자라는 것이 그의 약한 시력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사도행전은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영광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눈이 멀어버렸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아나니아로 인해 회복되기는 했으나 이것은 그의 시력을 상당 부분 약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필자의 손을 빌어 쓰던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직접 큰 글자로 친필을 남기는 것은 그가 거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치 여기서 "나로 하여금 모든 논쟁과 혼란을 마무리짓고 여러분들에게 최종적인 경고와 당부를 하게 해 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갈6:12-15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2.유대인의 자랑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함 뿐이라"

육체의 모양을 내기 위해 갈라디아 사람들을 강권하여 억지로 할례를 받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다. 여기서 유대인이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순수한 유대교 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적 성향이 강한 그리스도인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에서 여전히 유대교적인 관습에 깊이 붙들려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육체의 모양을 낸다는 것은 육체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육체의 모양으로 자랑을 삼는다는 것이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은  법을 율법을 다 지키는 것도 아니고 오직 육체로 경건의 모양을 내는데 적당한 것만 지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며 육체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육체의 자랑과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다. 육체로 자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육체로 자랑하고 육체의 영광을 도모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반드시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방 세상에서나 유대교 사회에서나 다 꺼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영광과 육체의 자랑, 육체의 안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성령과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을 극히 싫어하고 피하려 한다.

할례는 추구하면서 십자가는 피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치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본질상 할례와 같은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할례는 형식상으로는 육체에 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마음과 생명에다 하는 것이다. 할례의 본질은 육체를 제거하는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는 붙잡으면서도 십자가는 거부하는 행동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치 않으며 자신의 행동은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유대인 사회(세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시작된 한 사회가 그 생명력을 잃고 박제화되어 버린 죽은 사회,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버리신 사회에서 (하나님의 인정과 영광보다는) 사람의 인정과 영광을 받으며 마찰과 오해가 없이 무난히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할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을 좇아 행하지 않고 육을 좇아 행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이 다 그렇다. 만일 바울 당시의 사회가 오늘날 기독교 사회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당시의 여호와처럼 크게 받드는 사회였다면 아무도 할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며 아무도 십자가를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국가에서는 십자가가 크게 높이 받들려지고 있으며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육체의 모양내기와 자랑거리의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서도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다. 오직 성령을 좇음으로써 항상 자기를 부인하는 일, 모든 육체의 영광과 세상 자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역사하는 대로 사는 일은 세상의 납득과 인정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율법을 강조하며 율법을 지키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모든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특히 강조하는 몇 가지 율법만 지킬 뿐 그 밖의 다른 율법들은 지키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얻고자 하는데 있지 않고 오직 사람들 앞에서 육체를 자랑하고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얻으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경건, 눈에 보이는 인정과 칭찬, 육체의 평안과 안락, 영을 좇지 않고 육을 좇아 율법 생활, 종교 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내용은 언제나 이런 것들이다. 육신을 좇아 외식하는 사람들이 항상 눈에 보이는 영광만 추구하는 것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인도와 능력'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소경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이름만 신자지 실제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세계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무언가 눈에 보이고 육체에 와 닿는 것을 붙잡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많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이 눈에 보이는 진보, 눈에 보이는 실적, 눈에 보이는 성장, 눈에 보이는 영광에 매우 약하며 이런 것들에 깊이 매달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 없이는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이 느낀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생명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고 눈에 보이지 않게 하나님의 나라가 건축되어져 가는 것은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외형적인 역사가 없으면 불안하고 답답한 것이다. 신자들이 외형적인 것을 특히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그것이 필요하지만 그와 함께 세상 사람들에게 무언가 자기의 일을 설명하고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말하기 곤란한 것은 부끄럽고 거리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육체와 세상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정죄 받고 저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썩어지고 쇠하여지며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육신(사람)은 그 자체로서 좋다할 만한 것이 없으며 자랑할 만한 것도 없다. 성도의 육신은 그것의 좋은 모양으로 자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욕망을 표현하고 실현하기 위해 그릇과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다.

3.바울의 자랑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는 곧 육신(자아)의 죽음과 절망과 좌절과 폐기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무능과 실패와 폐기를 나타낸다. 육신에 대해 무언가 아직 자랑할 것이 있고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를 붙들며 십자가로 자랑할 수 없다.

십자가는 자아를 잃게 하고 세상을 잃게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이요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자랑이다. 세상 앞에서 세상 영광을 놓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랑은 분명하고 선명해야 한다. 세상 자랑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도 아닌 자랑을 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하고 율법에 규정된 각종 경건 의식들을 행하는 것은 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 일도 세상 자랑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가지고 육체의 영광과 육체의 자랑을 추구하는 것은 선명치 않은 일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 영광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없게 된다. 이점에 있어서 바울은 매우 선명하고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확실하게 하나님을 택했고 세상 영광이 아니라 확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영원히 영광스러운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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