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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 (요20:31)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3:15-17)

지난 주까지 우리는 일년간 함께 살펴보던 갈라디아서를 마쳤다. 다음 시간부터는 마태복음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 사이에 우리는 한 두 시간을 할애하여 성경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성경의 모든 진리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지를 점검하고 바른 성경 사용법을 익히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우리는 성경을 생명의 양식의 창고로 생각하고 여기에 많은 시간을 쏟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다루는 태도와 방법이 잘못 되면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성경을 연구해도 효과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성경에서 무엇인가 얻어보겠다고 막연히 성경을 붙잡고 앉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과 자세가 무엇인지 알아서 그대로 성경을 대하도록 해야 한다.


1.역사의 교훈

지난 이천 년의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가장 감사하고 다행스런 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인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생명의 말씀이 성경책으로 잘 보존되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가장 안타깝고 원통한 일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생명을 깊이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마귀의 방해로 인해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본래의 목적대로 올바르게 활용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이로써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게 되는 것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임하신 주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직접 접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도록 매우 실질적인 생명의 도구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성경을 본래 목적에 합당하게 쓰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해 매우 무지하고 빈곤한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생명'의 책으로 이해하지 않고 '지식'의 책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지식을 얻으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과 나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지식을,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지식을, 어떤 사람들은 삶의 지혜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성경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 그의 생명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거기서 다만 무언가를 깨닫거나 배우려고 했다.

성경을 생명의 책으로써가 아니라 지식으로 책으로 사용한 결과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가장 현저한 결과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안에서 연합과 통일이 아니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것에 접촉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며 그 생각과 말과 일을 통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은 한 생명이요 그의 영은 한 영이기 때문이다. 한 영 안으로 이끌리는 사람들이 하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생명과 달리) 지식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지식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을 다루는 사람들이 단지 성경 안에 있는 문자에 주의하지 않고 성경 안에 있는 영과 생명에 주의했다면 그들은 성경의 영 곧 진리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점차 생각이 같아지고 마음이 같아지고 해서 연합되고 통일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을 지식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그들 안에서는 연합과 통일이 아니라 논쟁과 주장과 분열이 일어났다. 성경을 성령의 빛 가운데서 대하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대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 안에서는 한 빛이 읽는 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일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없었고 오히려 여러 생각과 견해와 해석들이 난무하여 분열과 대립만 생기게 된 것이다.  

성경 연구자들은 시대별로 주제를 바꾸어가며 논쟁하며 토론했다. 그리고 거기서 최후에 확정된 하나의 사상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동일한 성경 내용이 다르게 해석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나무가 아니라 신학 곧 기독교 학문을 위한 교과서가 되고 말았다.

성경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고, 아들(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고, 성령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고,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고, 앞서 간 형제들(사도와 선지자들)의 삶과 가르침 및 처음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스라엘)의 삶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우주의 기원과 사람의 기원, 죄와 마귀, 구원과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참으로 성경 안에는 많은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다 살아 계신 하나님(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이며 하나의 우주적이고 영원한 생명과 인격(영생,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이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 생명을 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죽은 박제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컵 라면은 뜨거운 물을 부어서 풀어지게 만들지 않으면 밥이 아니라 메마른 밀가루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 역시 영을 사용하여 성령의 빛 안에서 읽지 않으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생명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메마른 교리책이나 죽은 경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오늘날 실제로 성경은 세상 뿐 아니라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불경이나 코란과 같이 하나의 (기독교) 경전 내지 한 권의 고전(古典)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성경을 읽지 않으며 읽는 사람들도 다수가 다만 의무적으로 읽거나 혹은 거기서 약간의 마음의 평화나 생활의 지혜를 얻을까 해서 읽는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神論)에,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의지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론(基督論)에, 그리고 성령님께 실제로 복종하는 것보다는 성령론(聖靈論)에, 자기(인간)의 죄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인간론(人間論)과 죄론(罪論)과 구원론(救援論)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고,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 곧 그리스도의 산 몸인 교회를 누리는 것보다는 교회 조직과 제도와 일과 교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그릇 사용한 데서 온 결과이다.  



2.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선조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고 그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성경은 생명의 책이요 영의 책이므로 지식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반드시 영적으로 접근하며 그 안에서 주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그것은 성경을 쓰신 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면 어떤 사람이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지도 금방 드러난다. 이 사실에 근거하면, 성경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과 그의 생명을 풍성하게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반드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 영이 살아 있고 활발히 영을 사용하는 사람, 곧 신령한(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주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려는 마음과 그 생명을 사모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성경을 대하는) 바른 태도와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 성경을 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언제나 사람이다. 사람이 바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성경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가 하고 언제나 방법만 찾는다. 그러나 첫째는 사람이고 그 다음이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경을 공부하지만 소수를 제외하고는 별 소득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중에는 많은 성경 공부 교재들이 있으며 효과적인 성경 공부 방법들을 적어놓은 책들도 많다. 그런 책을 쓴 사람들은 분명히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책을 읽고 똑같은 방법으로 공부를 해도 같은 결과를 얻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성경 연구의 근본적인 문제는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있다. 공부를 하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부지런히 공부를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공부를 해도 별 소득이 없는 것이다.

성실한 사람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즉 하나님과 함께 말씀을 배운다. 먼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배운다. 그러므로 좋은 결과를 얻는다. 거기에다 좋은 방법까지 사용하면 더 깊이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않고 요령으로 편하게 말씀을 익히려는 사람,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만 추구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삶에 유익을 주는 생명은 별로 공급받지 못하고 별로 쓸모 없는 지식들 곧 사람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며 남에게 자랑하다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헛된 지식만 익히게 될 뿐이다.  


2-1.영적인 사람

이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조건 중 첫째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단순한 말이나 문자가 아니라 영이다. 영은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수단이자 하나님의 생명을 접하고 인식하는 수단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며(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 영은 그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며 반응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영과 실제로) 예배할지니라"(요4:24)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9-14)

하나님은 한번도 사람의 연구나 조사에 의해 발견되신 적이 없으며 오직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서만 발견되신다. 영에 속한 일은 오직 영에 속한 사람만이 분별할 수 있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을 나타낸 책이며 성령에 의해 기록된 책이므로 전적으로 영에 속한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따라서 오직 영적인 사람만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

성경은 반드시 영을 사용하여 읽어야만 이해될 수 있다. 육적인 사람이 머리만 사용하여 읽으려 하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이 그 표면에 쓰여진 문자 외에 이면에 감추어진 영과 생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영에 속한 것이므로 영(생명)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그 진가를 알아보고 거기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처음으로 성경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한 그때이다. 이전까지 성경은 아무 의미도 없는 글들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것들이 의미 있는 말로 다가오게 되었고, 또한 읽을 때 많은 것을 깨닫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읽는 것이 즐겁고 또한 매일 그것을 읽지 않으면 답답하고 허전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증거이다. 거듭난 사람이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거듭난 사람은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생명은 날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않으면 안되는 생명이다. 성경은 오직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며 이런 사람에게만 열려지며 깨달아진다.

성경은 결코 총명함이나 학문적 열정, 집요한 탐구만으로 이해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으로 배고픈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고픈 사람에게만 필요하며 그런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1-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5-58)

이 말씀은 주님이 자기를 따르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어찌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요6:42,52,60)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6:52)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0-66)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제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조차도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버렸다.

확실히 주님의 말씀은 때로 문자적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 주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랬다면 주님을 직접 접해보지 못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말씀을 육신의 지각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말씀의 표면을 만지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영과 생명을 만짐으로써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사람들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썩어질(일시적) 양식을 구하지 말고 주님 자신을 구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궁극적인 결핍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궁핍의 원인은 양식이 없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살고 싶으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위로부터 온 영을 받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언제나 육신의 양식보다 영생(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공급)을 사모한다. 아들의 생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를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무 걸림이나 거리낌 없이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저의 생명의 떡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저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제 생명은 전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로 온 것입니다. 주님이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저는 죄 가운데서 죽었을 것이며 주님이 살과 피를 주시지 않았다면 제 안에는 생명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저의 영원한 양식이십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듭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성경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거듭난 사람이기는 해도 '신령한(영적인)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신자들 또는 히브리서의 대상이 된 유대 출신의 신자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기는 했지만 그 영적 생명이 너무나 미약해서 전혀 신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거듭나기 전의 자연인들처럼) 육신대로 생각하고 육신의 감정과 의지대로 행동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영적 젖먹이 또는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전에 한번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해서,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저절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을 소유하고 있다고 저절로 영에 속한 일들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날마다 실제로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영을 활발하게 사용하는 사람, 곧 범사에 실제로 영으로 사는 사람만이 신령한(영적인) 사람이며 이런 신령한 사람만이 영에 속한 일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거듭난 신자라고 해서 다 신령한 사람은 아니다. 눈이 없으면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가서 눈을 사용하여 사물을 적극적으로 보아야 잘 볼 수 있지, 눈이 있다고 해서 눈을 뜨지도 않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영도 마찬가지이다. 영은 다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감각 기관이다. 영은 저절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써서 하나님을 접촉해야만 소용 있는 것이다.

영은 사용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히브리서 11:1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믿음은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도록 만드는 수단이요 또한 우리가 소망 중에 바라는 것들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다. 믿음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의 세계에 접촉할 수 없다. 이 믿음의 도구가 바로 영이다. 영이 바로 눈과 같이 신령한 세계를 감각하게 만드는 기관이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영을 사용하여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삶에서 실제로 활발하게 영을 쓰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며 이런 신령한 사람만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영은 육신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이다. 단지 영을 소유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오직 매일 믿음으로 살며 영으로 사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영의 소유(所有) 여부가 아니라 영의 사용(使用) 여부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무지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성경의 가르침과 정신에서 떠나 헛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다 그들이 영에 대해 무지하고 영으로 살지 않는 육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날마다 영을 사용하며 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으며 오직 이런 사람들만 義(생명)의 말씀을 체험하며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참으로 분별할 수 있다.  
 

영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종교적 습관을 따라서 성경을 읽거나 육신의 지각만을 사용하여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언제나 닫혀 있다. 육적인 사람에게는 성경도 육이 된다. 같은 말씀이 주님을 참으로 영접하고 그 생명을 참으로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이 되고 생명이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나 육적인 사람에게는 육이 되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실제적인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만 가지고 성경을 읽으려 하거나 세상 상식과 경험만으로 말씀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성령의 빛 가운데서 말씀을 대해야 한다. 성경을 깊이 이해하려면 반드시 성경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께 주목하며 복종하는 길뿐이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럴 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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