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갈라디아서 5:16-2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서도 육신의 종(정과 욕심의 종)이 되지 않고 영의 원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육신에게는 육신의 길이 있는데 어떻게 육신이 육신의 원대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갈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 안에서 사람이 제 자리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제 자리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드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육신은 본래 육신(동물)대로 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사람(육신)을 만드신 것이 끝이 아니고 그 코에 생기(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정신)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존재를 영이라고 한다. 사람은 육신을 가졌지만 육신(동물)이라고 불리지 않고 영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영(정신)을 인식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사람은 영이 아니라 육신이 되었다.(창6:3)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서(회복되어) 다시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애를 쓸 것도 없고 자기 안에서 자기를 이끄시는 성령(하나님의 말씀)에게 복종하며 그를 따라가면 된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육신적인 삶(정과 욕심에 휘둘리는 삶)을 넘어설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 하에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육체 아래 있지 않고 또한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스스로 선을 행하며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자기 생각과 상상대로 헛되이 섬기는 (종교적)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하고 싶지만 힘과 지혜(방법)가 없어서 하지 못하던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한다.

둘째, 우리는 더 이상 육적 욕구와 감정에 매여 종노릇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싶지 않지만 육신이 원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했던 여러 가지 허무한 일들과 죄로부터의 자유케 된 것이다.

이런 삶의 전제 조건은 첫째, 하나님의 영(아들의 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그 영의 인도를 실제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그 영의 인도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그 인격이 하나님의 아들처럼 된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즉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 인내와 절제의 삶을 사는 그 사람만이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다.


육적 생명이 워낙 자연스럽고 강력하여 사람을 그의 생각과 소원을 넘어서 헛되고 악한 길로 강제하는 것처럼 영적 생명 역시 그처럼 자연스럽고 강력한 것이어서 그 육신의 욕망과 연약함을 넘어서 진리를 좇으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은 금지할(막을) 법이 없다. 마귀라 할지라도, 육신의 본성이라 할지라도, 영의 파워를 제지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영의 지배로 인해 육이 그 속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진실한 자리는 정욕을 죽이고 영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과 감정, 혈기, 기분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진실하고 솔직한 태도라고 착각한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외식(外飾, 위선)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혈기(血氣)를 부리는 것이다. 이 둘 다 잘못된 것이다. 어느 것도 영을 따라 사는 진실한 삶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의 길은 감정을 숨기고 거짓으로 평안한 척하거나 거짓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척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육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마구 화를 내거나 형제를 싫어하는 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반응하고 표정을 관리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의 인도를 실제로 받느냐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감정적이고 외향적이든 감정을 숨기고 점잖은 척 하든 다 육적인 것이다. 쾌락적이든 금욕적이든 성령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육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하든 결국 육신의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것이 마땅하며 육신대로 사는 것은 생명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며 생명에 맞지 않는 어색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개는 개답게 살아야 하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에게 빚진 것도 없고 따라서 육신의 정욕에 맞추어줘야 할 것도 없다. 우리는 육신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다른 어떤 뜻을 품고 그 어떤 욕망과 감정을 나타낼 때 단호히 'No' 라고 말해야 한다. 마귀는 여전히 우리가 육신에 매여 있으며 즉 육신에 빚이 있으며 그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속삭인다. 마귀는 우리가 여전히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어느 정도 육신대로 살지 않으면 나중에 육신이 견디지 못하여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한다.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따라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일정한 율법을 치키면서 종교생활을 하라고 부추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과 우리의 일상 생활을 분리시키려는 마귀의 궤계이다.


영을 좇아 사는 사람은 헛된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참된 영광을 알기 때문이다. 헛된 영광이란 세상 영광이고 육신의 영광이고 사람의 칭찬과 부러움과 추종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요 어리석고 타락했으며 그 판단이 정함이 없다. 그리고 땅과 거기 속한 물질과 거기 속한 권세와 영광은 다 영원하지 않은 것이며 덧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세상 권세란 물고기에게 튜브를 씌우고 오리발을 달아주는 것과 같이, 그리고 새에게 낙하산을 씌어주는 것과 같이 불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권세를 주는 것이 무슨 큰 영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광은 따로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접 받고 인정받고 칭찬을 받아야 참으로 영화롭게 된다. 사람이 육신의 정함 없는 욕망을 따라 그 좋아하는 것들을 추구하고 그것을 손에 움켜쥐고는 기뻐하며 그것이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며 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며 사탄에게 깊이 속은 것이다. 아이가 딱지를 한 움큼 움켜쥐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것은 오직 자기 생각 속에서만 영광이고 부(富)일뿐 실제로는 흙을 움켜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므로 사람과 영광을 놓고 다투거나 따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사람 때문에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며 그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이므로 우리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좋은 것은 전달 도구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이 사람을 감동시키며 움직이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 자신이 그의 부와 능력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사람 때문에 실망하거나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알고 참된 영광과 행복이 무엇인지 안다. 성령이 우리 눈을 밝혀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관성이 있으며 선명하며 확고하다. 어떻게 선명하고 어떻게 확고한가? 사람과 자비와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와 겸손과 선을 추구하는 것과 신실함에 있어서 그러하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1 성경의 합당한 사용 (2) (요7:17) / 2003. 3. 31 이상봉 2010.05.03 3904
50 성경의 합당한 사용 (1) (요5:39, 20:31) / 2003. 3. 23 이상봉 2010.05.03 3890
49 예수의 흔적을 지닌 인생 (갈6:16-18) / 2003. 3. 16 이상봉 2010.05.03 4286
48 십자가로 자랑함 (2) (갈6:12-18) / 2003. 3. 9 이상봉 2010.05.03 4094
47 십자가로 자랑함 (1) (갈6:11-15) / 2003. 3. 2 이상봉 2010.05.03 4108
46 낙심치 않고 끝까지 주를 따름 (갈6:9,10) / 2003. 2. 23 이상봉 2010.05.03 3925
45 영을 위해 심는 삶 (갈6:7-9) / 2003. 2. 16 이상봉 2010.05.03 4316
44 진실한 인생 (2) (갈6:6-8) / 2003. 2. 9 이상봉 2010.05.03 4047
43 진실한 인생 (1) (갈6:1-8) / 2003. 2. 2 이상봉 2010.05.03 3778
42 성령으로 삶 (4) (갈5:25,26) / 2003. 1. 26 이상봉 2010.05.03 4032
41 성령으로 삶 (3) (갈5:25,26) / 2003. 1. 19 이상봉 2010.05.03 4066
40 성령으로 삶 (2) (갈5:25,26) / 2003. 1. 12 이상봉 2010.05.03 3612
» 성령으로 삶 (1) (갈5:16-24) / 2003. 1. 5 이상봉 2010.05.03 3835
38 성령의 열매 (2) (갈5:22,23) / 2002. 12. 29 이상봉 2010.05.03 3610
37 성령의 열매 (1) (갈5:22,23) / 2002. 12. 22 이상봉 2010.05.03 5541
36 육체의 일 (3) (갈5:19-21) / 2002. 12. 15 이상봉 2010.05.03 4331
35 육체의 일 (2) (갈5:19-21) / 2002. 12. 8 이상봉 2010.05.03 4254
34 육체의 일 (1) (갈5:19-21) / 2002. 12. 1 이상봉 2010.05.03 6189
33 성령을 좇아 행함 (3) (갈5:16-18) / 2002. 11. 24 이상봉 2010.05.03 3851
32 성령을 좇아 행함 (2) (갈5:16-18) / 2002. 11. 17 이상봉 2010.05.03 3969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