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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말씀이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는 이 축복의 말로써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를 맺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란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는 어떤 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은혜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은혜 자체이며 은혜의 핵심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영에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충만하기를 원한다' 또는 '너희가 항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인사 또는 축복은 그 앞의 16절에도 있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바울은 참으로 갈라디아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궁극적 은혜가 항상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는 평강과 긍휼이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오직 '이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리고 16절과 18절의 두 축복(인사)의 말씀 사이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는 말을 끼워 넣었다. 그는 왜 마지막 인사와 축복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제한을 덧붙였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 및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울이 받으라고 축복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받기에 합당한 자리에 있는 사람만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며 누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을 받으며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인가? 바로 아들의 자리에 있는 자이다. 아들의 자리에 앉으며 아들의 자리에서 행하며 아들의 자리에 굳게 서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에 합당한 자이다.

바울이 말한 규례란 범사에 자기를 십자가로 가져가고(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규례이다. 육신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새 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식 곧 우리의 규례이다. 물은 낮은 자리에만 고이듯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오직 그것을 참으로 받고자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곧 아버지의 생명을 갈망하며 아버지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만 임한다. 육신으로 자랑하고 육신에 소망을 두고 육신의 영광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아들의 흔적(표적;sign)을 가진 자 곧 그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에게만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아들의 자리에 있으며 아들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육체의 욕망과 소원에 대해서, 육체의 자랑과 영광에 대해서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강은 오직 이렇게 죽을 것, 썩어질 것, 허무한 것들에 대해서 죽은 자에게만 있다. 하나님의 은혜 곧 사람을 그 모든 죄와 고통과 혼란, 사탄의 미혹과 요동치는 삶에서 건져 안식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거친 사람에게만 실제적으로 역사한다.

예수의 흔적은 단순히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의 흔적이 아니라 땅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람으로 사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므로 바울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은 주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전적으로 아버지(하나님)께 드리며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길을 걸었다.

둘째, 그렇게 예수의 길을 따르다가 그는 예수님과 같이 세상으로부터 거부와 대적과 핍박과 고난을 받았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그의 고백과 같이 매일 십자가를 졌고, 또한 외부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그와 같이 매순간 자신의 육체적 야망과 욕망과 맞서 싸우며 거부함으로써(자기를 부인함으로써)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는 고후11:24,25에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그의 몸에는 그가 그리스도를 섬겨온 긴 세월을 말해주는 많은 실제적인 상처들이 있었다. 이런 상처 또한 예수의 흔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흔적은 그의 신체가 아니라 정신에 깃들어 있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었다. 그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신 주님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또는 성령님의 강권에 의해 날마다 연단을 받으며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외식을 통해 육신의 모양을 내고 거짓 경건의 흔적을 지니고 있던 것과 얼마나 다른가!  

셋째, 바울은 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걸었으므로 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과 권세도 그 몸에 지니고 있었다.  
원수들은 억지와 거짓말과 위선으로 진리에 속한 주 예수님이나 바울과 같은 이들의 길을 부정하고 왜곡하며 대적하려 했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그들 자신들의 양심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진실된 인정과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복종하며 진리를 따른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과 자기 양심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항상 평안하며 영광과 권세가 있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과 박해자들이 아무리 그를 괴롭히고 흔들어도 평안했으며 담대했고 견고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에게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봐야 그의 평강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모든 조직과 방법을 사용하여 그를 흔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며 보호하시는데 누가 감히 아들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흔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승리의 길은 아들의 자리에 견고히 붙어 있는 것이다. 육을 좇지 않고 오직 영(아들의 생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자기 삶 속에서 고통스럽다고 해서 예수의 흔적을 떨쳐버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했더라면 그는 잠시 육신은 편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평강을 잃고 흔들렸을 것이다. 그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 지니기를 거부했다면 그는 결국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으로 인해 날마다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보다) 더한 괴로움을 받았을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피하면 마귀에게로 가는 것이고 진리를 피하면 마귀의 거짓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을 사는 것이 그리고 진리의 영을 따라 사는 하루가 그렇지 않은 천 날보다 나은 이유가 거기 있다.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아무도 그를 그의 견고한 안식과 평안에서 흔들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자유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도 나를 괴롭게 말라"고 말하려면 실제로 우리가 사람의 영광과 사랑으로부터 자유하며 세상의 인정과 칭찬으로부터 먼저 자유해야 한다. 우리 인생의 영광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들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은 육체를 따라 사는 자에게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대적을 당하고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육체의 고난을 받고 영혼의 단련을 받은 사람에게만 있다.


갈라디아서의 결론은 이것이니 우리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좇으며 영을 좇아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영을 받아들임으로 그 영으로 행하면 육체는 자동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5:24) 영으로 살 때 우리 육체는 힘을 쓰지 못할 것이며 우리 삶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영을 따라 살 때 그리스도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 나타날 것이며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진리에서 벗어난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에게 바울이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영으로 행하면 매사에 자유롭고 경건하고 삶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주의할 것은 매사에 우리가 종교적이 되지 말고 영적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적이 된다는 것은 매사에 성령에 주의하고 성령께 순종함으로써 살아 계신 주님과 접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곤경에 처한 형제를 돕거나 이런 저런 일들로 괴로워하는 자녀들을 돌볼 때도 우리는 종교적이 되지 말고 영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일을 할 때 우리는 대개 '이 일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니 너는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하든지 또는 '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너그러이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할 때 상대방은 그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잘 안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거나 혹은 어렵게라도 그렇게 하고서는 자부심을 갖거나 공덕을 하나 쌓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충고는 교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은 것일지 모르나 영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런 도움을 받은 그 형제 또는 우리의 자녀는 종교적인 사람이 될 뿐 성령과 접촉하여 하나님을 더 알고 더 누리는 경험을 하게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삶의 어려움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형제를 돕는 최선의 길 그리고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로 하여금 그 상황에서 마음을 열고 주님을 접촉하도록 인도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그는 참거나 혹은 부당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믿음으로 이기려고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 그 일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말고 오직 주님 자신에게로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기독교적 윤리에 따르거나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거나 괜히 분을 내거나 두려워해도 소용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그 문제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으로는 일시적으로 문제 자체는 피하게 되겠지만 그로 인해 주님을 만나 생명을 공급받는 기회를 가지지는 못한다. 우리가 만일 가장 좋은 가르침을 베푼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상대방을 주님에게서 벗어나게 만들고 영과 접촉하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게 만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과 이야기하며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주님의 설명을 듣고 주님으로부터 여유를 얻을 때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를 모든 상황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며 여유롭게 하여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주님과 접촉하여 그 인격과 그 생명으로 적셔지는 것 없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거니와 혹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는 승리했다는 자부심으로 그 마음이 교만해지며 하나님을 깊이 알고 의지하는 것이 없이도 부유하고 충만한 인생이 되어 진정으로 충만한 삶 곧 영생을 누리는 자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갈라디아서 3:13,14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참으로 얼마나 완전한 복음인지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만 죄 사함과 의롭다 함과 거룩케 됨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얻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포함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 즉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만유를 포함하는 생명의 주(하나님)를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곧 우리 안에 만유가 있으며 우주의 모든 축복이 다 임했음을 의미한다.

찬송가 489장은 우리에게 우리가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복을 받은 것이 있으므로 센다면 셀만한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우리에게는 그렇게 세어볼 만한 복이 별로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여러 가지 복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하나의 완전하고 풍성한 복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神)이 부어진 것 곧 성령님(하나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연말에 그 해에 받은 모든 물질적, 환경적 복을 세어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세어볼 만한 복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측량할 수 없는 근본적인 복이 있으니 다만 이것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만족할 수 있다.

주님은 지금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고 그 주님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이시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지금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교통하시며 우리에게 복이 되시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 주는 영으로서 우리를 바깥 환경과 관계없이 만족스럽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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