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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했지만 바울은 할례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했다. 할례는 무엇이고 십자가는 무엇인가? 할례와 십자가는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해 죽은 육체(자아)를 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와 십자가는 다 같은 것이다. 할례는 십자가의 그림자이고 십자가는 할례의 실체이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그러므로 정상이라면 할례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마땅히 십자가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는 붙잡으면서도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는 거부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할례는 가짜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방법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바로 할례의 정신이다. 처음으로 할례를 받았던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으며 그의 계통을 이은 모든 참 이스라엘인들은 그렇게 했다. 오늘날 할례와 가장 유사한 의식은 세례이다.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십자가이다. 세례든 할례든 다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할례나 세례는 다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 내 모든 것이요 하나님이 나의 방법이고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할례나 세례나 안수나 직분이라는 외형만 붙잡고 있는 것은 육체의 모양일 뿐이며 그러한 육체의 모양으로 자랑을 삼는 것이다. 이것은 다 육체로 자랑하는 것이며 (영이 아니라) 육체를 강화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육체의 자랑으로 자랑하며 육체의 영광을 도모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변질시켜 사람의 계명과 사람의 종교로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종교 세계'를 가리켜 '세상'이라고 말했다. 종교는 세상에 속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이같은 세상에 대해 끝났다고 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유대교에 대해서 끝났고 또한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지만 속은 여전히 텅텅 비어 있고 초라하고 추악한 세계에 대해 끝났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참으로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아무 의미도 없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직 새 피조물 곧 새 창조뿐이다. 새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세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새 사람은 아들의 생명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아 시작한다. 이 과정을 달리 표현하면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끝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자라가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할례나 무할례와 상관없고 오직 십자가와 성령을 좇는 것이다.

새 사람, 새 창조는 다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은 교회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단지 사람의 단체인줄 알지만 사실은 교회는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 곧 성령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육신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입은 완전한 새 사람이다. 할례를 받았건 받지 않았건, 지식이나 재물이나 권세가 많고 부유하건 그렇지 않건 그 모든 것은 다 지나간 옛 세계(옛 창조)에 속한 것이며 새 창조와는 상관없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갈라디아교회가 새 사람, 새 창조, 새 피조물, 새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다. 흔히 교회라고 하면 마치 유대교가 그러했듯이 뾰족탑을 한 예배당(성전)이나 거기서 드려지는 예배(제사)나 목사와 장로와 같은 성직자들(제사장)로 구성되어 있는 조직체를 연상하지만 그것은 잘못 안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조성되고 또한 조성되어 가는 새 창조와 새 사람이다. 우주 가운데 진실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사람이 한 생명으로 연합된 이 새 사람뿐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붙잡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동떨어진 일을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여기서 말하는 규례란 무엇인가? 이 규례는 '믿음으로 살고' '영을 좇아 사는' 새 사람의 삶의 원리를 가리킨다. 이것은 율법을 지키며 육체의 영광을 도모하는 옛 종교의 삶의 방법과 구별되는 새로운 삶의 방법이다. 율법을 지키거나 자신을 개선하거나 종교적인 의식을 지키는 규례가 아니라 십자가로 살며, 영으로 살며, 믿음으로 살며, 육체의 모양으로 자랑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랑하며, 세상으로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의 규례요 '새 삶'의 규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참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 신자들이 포함된다. 바울이 이 말을 쓴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갈라디아교회 형제들이 바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관계없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곧 참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영원한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혈통적(민족적), 육체적(외모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고 오직 그 영과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만 참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내용인 영원한 왕국에 대한 이상을 생각나게 한다. 새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은 왕국이다. 이것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누가 왕인가? 물론 하나님이다. 그러나 장차 우주 가운데서 만물을 다스리실 그 하나님은 홀로 계시는 아버지만이 아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 안으로 부르심을 입은 많은 아들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함께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새 이스라엘 또는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주 가운데서 왕이 되셔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다스린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鐵杖)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2:26,27)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누구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는가? 바로 이 규례를 '행하는' 자이다.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십자가의 진리 곧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하고 그 영을 따라 사는 삶은 지식 안에만 머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복종하며 날마다 기다리며 날마다 문제와 위기 가운데서 마음을 강하게 하여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즉 영에 속한 삶은 100% 실천적이고 실행적인 것이지 절대로 관념적이거나 지식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게 허약한 이유는 신자들의 지식이 부족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이 규례 곧 성령을 좇아 사는 이 규례를 범사에 실제로 행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은 굉장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들은 틀림없이 실제로 성령께 주목하고 성령께 의지하고 복종하지 않는다. 영생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는 예외가 없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승리의 길은 오직 생명의 말씀을 실제로 받아들이며 실제로 순종하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2-25)

아무라도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고 아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부활 생명의) 능력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실제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뿐이다. 하나님의 평강은 오직 '이 규례'를 행하는 사람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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