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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일 (2) (갈5:19-21) / 2002. 12. 8

2010.05.03 10:03

이상봉 조회 수:4254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 육체는 생존을 위해 먹고 마신다(첫째 일)  감각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음식, 술)과 생식 기능(性)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며, 여러 가지 오락을 추구하며,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한다(둘째 일). 이런 것들(생존과 안전과 쾌락)을 확보, 유지, 증대시키기 위해 한편으로 자기보다 강한 자를 의지하고(셋째 일)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과 싸우며 경쟁하며 범죄한다(넷째 일).  

갈라디아서 5:19,20절에 언급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및 {술 취함}과 {방탕함}은 위에서 언급한 일 중 둘째 일 곧 '쾌락을 추구하는' 육체의 일에 해당하며, {우상 숭배}와 {술수}(점쟁이나 무당을 찾는 것)는 셋째 일 곧 삶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의지하려는 육체의 일에 해당한다. 그리고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는 넷째 일 곧 생존(삶)의 유지와 보장(안전) 내지 자기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중 우리는 지난 주에 둘째 영역의 육체의 일 곧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조금 생각했다. 쾌락과 관련된 육체의 일 중 가장 현저한 것이 음행과 더러운 것, 호색이다. 이것은 모든 육체의 일 중에서도 가장 현저한 것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이다.

육체의 성적 욕망과 그것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저지르는 범죄는 인류의 모든 욕망과 범죄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뿌리뽑기 어려운 것들이다. 생존은 먹고 마시는 것과 아울러 생식(번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식욕과 성욕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런 만큼 사탄이 사람을 사로잡아 범죄하도록 만드는데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다. 성적 욕망이나 성 행위 자체가 전혀 죄가 아니지만 사탄은 그것들을 본래의 목적과 용도를 넘어서 오용하게 만듦으로써 그것들을 죄와 연관시킨다. 자동차는 달리는 것이고 총은 쏘는 것이며 칼은 베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차가 언제나 달리고 총이 언제나 쏘고 칼이 언제나 벤다면 그것은 생활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큰 흉기가 될 것이며 그것처럼 무서운 저주거리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은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만 영에 의해 조절되고 통제되지 못하면 가장 무서운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만다.

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도구이며 연합의 도구이다. 성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요 연합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성적 결합은 사랑의 최종 표현이자 연합의 최종 표현이다. 생명은 이러한 수단 곧 성을 통한 사랑의 연합 안에서 만들어지고 자라고 확대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의 고귀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명이 합해짐으로 만들어졌다. 이 생명의 연합은 연합의 절정이요 사랑의 절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적 결합은 생명을 위한 사랑의 최종 표현이고 연합의 최종 모양이다. 그러므로 성(성적 결합)이 오용되거나 파괴되면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가 생기며 생명의 질서(사회 질서, 인간 관계)에 치명적인 결과가 생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로 알게 되면 성적 오용과 남용은 생각할 수도 없다. 우리 삶은 영의 인도를 받는 삶이지 육의 충동을 따르는 삶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르는 이 말 곧 성은 생명과 사랑, 생명과 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소중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이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성에 대한 '다른 말'들이 많다. 성을 마치 음식을 먹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성적 관계를 갖는 것을 마치 이 음식 저 음식을 먹는 것처럼 가볍게 하자는 것이 바로 그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성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은 해로운 음식과 좋은 음식을 가려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에서 해방되어 아무 것이나 마구 먹자는 말과 같은 사악한 거짓말이다. 진리에서 떠남으로써 얻는 이익은 아무 것도 없다. 오늘날 마귀는 성적 타락을 부추기기 위해 온갖 매체를 통하여 성에 대한 과거의 관념과 인식을 바꾸려는 일을 하고 있다.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마귀의 역사에 대응하여 오늘날 성령님은 무엇보다도 술 취함과 방탕함과 아울러 성적인 방종에 대해 경계하신다.

지난 주에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말세의 최후 심판이 이르기 전에도 성적 타락이 극심한 지역들을 미리 본보기로 심판하셨다. 노아 홍수 때도 그랬고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도 그랬다. 죄 중에 가장 크고 기본적인 죄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의 일을 말할 때 이것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음행이라는 말을 썼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떠나 최종적 멸망에 이르게 하려는 사탄의 공작(시험)의 순서가 먼저 음행을 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파괴되게 만들고 다음으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적 음행이 먼저 일어나면 다음에 영적 음행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3-18)

우리는 다시 한 번 성적 결합은 영적 결합의 표현이요 수단임을 주목해야 한다. 창기와 합하면 창기와 한 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창기와 합하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곧 창기 뒤에 도사리고 있는, 아니 창기의 타락하고 음란한 인성 또는 창기와의 음행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귀와 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하나님과의 연합은 절대로 이것과 병행되거나 공존될 수 없다.


다음으로 육체의 일 중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생활의 염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순서상으로는 우상 숭배와 술수가 나와야 하지만 이 일은 사실상 생활의 염려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육체가 하는 첫째 일은 생존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으로만 이루어진다면 굳이 '육체의 일'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고 다만 '생활'이라고 부르면 될 일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먹고 사는' 이 일을 적당하고 올바르게 추구하지 않고 과도하고 그릇되게 추구해왔다. 마치 이 일이 삶의 모든 것처럼, 여기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온 힘과 신경을 여기에 쏟고 미친 듯이 이 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생활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이미 그것은 생활이 아니라 짐이고 멍에이다. 생활은 단지 '하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매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신 것은 그들로 '살도록' 창조하신 것이지 죽도록 창조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죽더라도 사는 날 동안은 사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은 후로 사는 것이 육체에게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지 못할 정도로 환경이 악화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생활로 인해 염려하고 과도히 수고하는 것은 환경 탓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잘못된 탓이다. 생활에 매여 그것의 종이 되고 그것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털어 넣고 온통 거기에만 힘을 집중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일이 아니고 갈라디아서 5:19에서 말하는 소위 '육체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 사탄에게 미혹되어 삶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31)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일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안해도 될 염려를 하며 안해도 될 일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땅이 저주를 받아 생활 환경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생활 문제는 가만히 있으면 해결되지 않고 신경을 쓰고 힘을 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렇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신경을 쓰고 수고하여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신경을 쓰고 열심히 일하는 것과 염려하고 온통 정신이 팔리며 싸우며 미친 듯이 생활에 매달리는 것은 다르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모아놓은 것이 없지만 그날 그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받아 먹고 산다. 사실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들은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작은 것은 큰 것에게 먹히는 것이다. 식물은 동물에게, 작은 동물은 큰 동물에게 먹힘으로써 생명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공중의 새를 어떻게 먹이시는가? 벌레나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벌레나 작은 동물들 역시 자기보다 작은 또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어느 것도 생활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생활에 매이지도 않는다. 그저 살뿐이다. 사는 날까지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이다. 즉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날까지 편안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다. 양계장에서 키우는 닭이나 양돈장에서 키우는 돼지는 날 때부터 죽을 운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그저 주는 대로 먹고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다. 이러한 삶은 사람보다 훨씬 편안하고 평안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사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담대함이 있거나 특별한 철학이 있거나 특별한 믿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안에 새겨진 생명이 그렇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는 다 죽음은 원하지 않으며 그것이 다가오면 피한다. 그것은 생명 안에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생명 유지의 본성이 없고 '죽고 싶어하는 본성' 같은 것이 들어 있다면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단 하루도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생명체 안에 살려는 본성이 없으면 먹지도 않을 것이고 힘들여서 숨쉬고 신진대사를 영위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더구나 힘들여서 먹이를 얻으려고 일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다 그 본성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정해진 생명을 따라 그렇게 하는 것뿐이지 과도히 하지는 않는다. 되지도 않을 일을 추구하거나 그것으로 염려하며 몸부림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볼 때 그들의 환경은 먹고 먹히는 살벌(殺伐)한 환경이고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환경이지만 다들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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