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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 그리고 유일한 방법은 성령을 좇는 것이다. 성령을 좇는 사람만이 육체의 능력(할 수 없음)을 극복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사람이 불완전한(타락한 육신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완전한(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을 도저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흠 있는 (육신의) 생명으로 살지 말고 오직 아들의 생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여러 주일 성령을 좇는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해 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러분은 성령을 좇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선명해 졌는가? 성령을 좇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자기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다. 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전의 나 곧 육신의 생명으로 사는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고 똑똑한 것도 없고 어리석은 것도 없고 이런 생각 하는 것도 없고 저런 생각 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겉 모습만 놓고 말할 것 같으면, 영락없이 넋이 빠진 사람이요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 할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이 실제가 없다면 성령을 좇는 사람은 영락없이 멍청이요 얼간이다. 아무 생각도 아무 주장도 없고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아무 염려도 없으니 말이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 무능하고 못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기를 주저할만큼 너무 잘나고 너무 유능하고 똑똑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 곧 전적으로 믿음으로 살고 전적으로 은혜 안에서 행하는 삶이 힘들다고 한다.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능력면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 쉽고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 어려우니 이것은 능력 문제가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사실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은 건강하고 팔팔한 청년에게만 힘든 것이 아니라 힘없는 어린이나 노인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지식과 재물, 권력이 있는 유력한 사람에게만 힘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사람에게도 힘들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남이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자기 스스로는 다 잘났다고 생각하기 (그리스도인의 삶)때문이다. '내가 굳이 십자가의 길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바로 믿음의 가장 큰 단지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서 대신 사시는 것이므로 장애물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이기고 주님의 발 아래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면 영을 좇아 사는 삶이 바로 시작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3,4)

율법이 사람에게 소용이 없는 것은 육신이 연약하여 그것을 받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은 동물이므로 동물적 성향을 띠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먹고 마시고 눕고 쾌락을 느끼는 삶을 원한다. 이것은 육신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누가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말씀)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세포)에 새겨진 요구(유전자의 요구)에 반응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몸을 의의 병기로 쓰려고 해도 몸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고 오직 몸 자체의 안락과 쾌락을 위해 움직이고자 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선을 아는 지식이 있는 것이나 선을 향한 열망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소용없는 것이다. 육신으로 사는 사람은 육신의 더 본질적인 욕망이 그것을 이겨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께 대해) 죄 있고 흠 있고 무능한 육신을 폐기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영을 사람 안에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좇지 말고 오직 영을 좇아 살아야 한다. 육신을 좇는 사람은 영원히 자신의 연약함만 탓하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을 좇는 사람은 자신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다 받아낼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육신을 옹호하거나 자극하거나 거기에 활력을 불어넣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하고 섬기며 기쁘게 해야 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고 잘되게 하는 쪽으로 즉 속 사람을 잘 되게 하는 쪽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겉 사람(육신)을 위하는 쪽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율법은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하도록 자극하는 자극제이다.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룬 만큼은 자기 자랑과 영광의 재료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율법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능히 섬기게 만들지도 못하도 도리어 육신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만들고 자랑하게 만들기 때문에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율법도 부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율법으로 서로를 판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 단단히 붙어 있도록 자극하고 도와야 한다. 모두가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을 좇아 살도록 권면하고 이끌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이 서로에게 지워야 할 짐은 성령의 짐이며 서로에게 지워야 할 멍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멍에뿐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6:14,15)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육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영의 인도 아래 있다는 말과 같다. 모든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성령(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육신의 생명으로 살지 않아도 되며 육신의 요구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 육신을 가진 사람은 다 육신대로 살아야 하고 육신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영은 육신에게 생명이 되셔서 육신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육신의 요구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 육신의 정당한 요구 즉 생존에 꼭 필요한 요구는 성령께서도 아시고 채워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는 사람이라고 항상 육신과 갈등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육신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제대로 사용하며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 인해 그의 육신은 오히려 더 좋은 상태를 유지하게 될 수도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었으므로 사람이 더 이상 육신(스스로)의 노력으로써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육신으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그 사람 안에서 능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므로 그 어떤 외부적인 노력도 할 필요가 없고 또한 할례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나 제사와 같은 그 어떤 외부적인 경건적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둘째,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율법의 요구와 정죄와 심판에 직면하지 않는다. 그것은 율법은 오직 육신에게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법은 사람이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이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 안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시니 그 사람은 법을 지키는 것과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오직 두 갈래 길이다. 성령을 좇아 살든지 아니면 육신대로 살든지 그 둘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중간도 없고 다른 길도 없다. 성령을 좇으면 육신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성령을 좇지 않으면 그는 육신으로 살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은 반드시 율법을 필요로 하게 되며 또한 율법이 그 안에서 역사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원함과 행함 사이의 큰 간격에서 오는 갈등과 죄책을 피할 수 없으며 모든 자유와 안식을 잃고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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