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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생명과냐 선악과냐 / 창2:8-17

2010.05.03 14:55

이상봉 조회 수:3701

- 생명을 따라 사는 삶 (삶의 두 원리) -
 

사람은 하나님께서 흙에다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심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후 사람을 떠나셔서 멀리 초월해 계신 분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릇이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며 그의 생명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바울은 엡1:23에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증거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만물 밖에 계실 뿐 아니라 또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히브리서 기자도 히1:3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증거한 바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가면서 계속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거듭난 후에도 계속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며 그 생명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안그래도 될 일을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생명 공급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으로써만 제대로 유지되며 풍성하게 될 수 있다.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것을 의도하셨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하나님이 친히 공급하시는 양식으로 유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들이 그 낳은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천명하신 것은 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는가? 창 2:8,9의 말씀은 그것이 생명나무로 말미암아 가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열매를 먹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정하셨다. 물론 그 후 사람이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는 생명나무 대신 '말씀'을 주셔서 생명나무를 대체하게 하셨고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완전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다 모양만 다른 생명나무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동산에는 생명나무뿐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문자 그대로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어 사람이 스스로의 지혜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나무'였다. 이 나무는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사탄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심겨진 것인지 사탄이 나중에 심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 두 나무가 동산에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어느 것을 택하여 살 수 있도록 제시되었다.

이 두 나무는 사람이 살아가는 두 가지 방식, 두 가지 행동 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하는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그대로 하는 것이다. 전자는 [선악을 하는 지식(지혜)]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후자는 [생명의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선악의 원리와 생명의 원리 이 두 가지가 인생의 두 원리이다.

선악의 원리는 무엇이며 생명의 원리는 무엇인가? 선악의 원리는 '어떤 사람이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혹은 이로운 일인지 해로운 일인지, 하고 싶은 일인지 하기 싫은 일인지 등을 따져본 후 옳은 일이면(좋은 쪽이면) 하고 그른 일이면(좋지 않은 쪽이면)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행동의 원리는 보통의 인간들이 삶을 살아갈 때 취하는 행동 원리이다. 기독교 신자라도 이런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단지 그들과 세상의 차이점이 있다면 세상은 그냥 상식이나 자기 생각을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삼지만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준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해서 행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지혜로 선악을 판단하여 행하는 것은 결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비록 그것이 성경이라 할지라도) 바깥의 기준을 따라 행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기독교는 선한 기준을 따라 선악을 분별하며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기독교는 분명히 선악을 따라 사는 것 以上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선악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행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행위는 아무리 잘 되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깊은 속 사정대로(뜻대로) 어김 없이 살게 만들 수는 없다. 어떤 외적 표준이나 자기 판단에 따라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 삶의 자세는 어디까지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타락한 행동 방식이다. 아무리 착한 일만 골라 하고 나쁜 일은 배격하면서 사는 삶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타락한 인간 가운데서 최고의 삶은 될지언정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삶은 될 수 없다.  

물론 구약 시대의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도 선악의 분별 기준(율법)을 가지고 그에 따라 선악을 분별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온전한 것이 오기 전, 즉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할 수 없이 모형과 그림자를 따라 산 것이지 그 자체가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율법 안에서의 삶이요 옛 언약 하에서의 삶이지 새 언약 하에서의 삶이 아니었다. 구약도 본질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기독교는 더더욱 종교나 윤리가 아니며 그 이상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생명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났다면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을 누리기 위해서 위로부터 새로 받은 것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새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기 때문에 선악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도에만 반응하는 생명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속에 있는 아들의 생명에 반응하며 사는 자들이다.

기독교는 결코 '하라 하지말라'는 식의 계명을 던져놓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요 도덕, 윤리이다. 기독교는 어떤 일에 대해 먼저 하나님의 생명의 반응을 시험해보고 그것이 만족하면 움직이는 것이다.

요한일서 2:20에서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라고 말씀했고 2:27에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속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율법을 이리저리 헤아리며 선악을 분별하여 행할 필요가 없다. 오직 내적 생명의 지시에 따라 자신있게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십계명처럼 몇십 몇백 개의 계명으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여 주면 신앙 생활을 하기가 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람이 주님과의 관계를 갖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결과가 생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풍성한 생명을 계속 공급받을 필요가 있으며, 그 생명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깊이 (기도 등으로) 교제하며 형제들과 말씀과 사랑으로 교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 없이 나혼자서 편하게 그리고 주님의 뜻에 귀 귀울임 없이 상식적 기준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생명(주님)이 움직이라고 하면 세상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움직여야 하고, 주님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세상이 모두 움직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요7:2-10을 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이 아직 주님을 믿지 않았으므로 비웃으며 예수님께 말하기를 '유명해지려거든 이런 시골에서 다닐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기를 나타내라'고 했다. 이 때 예수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답하셨다. 주님은 동생들이 물을 때 아직 자기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으나 동생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객관적인 어떤 기준, 즉 상식이나 동생들의 말 등에 따라 자기 때를 정하거나 행동하시지 않으셨으며 오직 자기 속에 있는 아버지의 생명의 인도에 따라 행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금방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다가도 또 금방 따라 올라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 만일 상식에 따라 행했다면 주위의 이목이나 체면 때문에 이런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선과 악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없이 외적 판단 기준이나 내 지식으로 선악을 좇는 것은 단지 선악을 [구별할] 뿐이지 결코 그 善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뻔히 선악을 알고 분별해놓고서도 선을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선악을 구별하여 선을 좇아 행하려고 한다면 주님의 생명을 좇아 행해야 한다. 생명은 선악을 초월하는 표준이다. 선한 일이라고 무조건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상식에 어긋나는 일라고 해서 다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선악의 기준만을 따르는 자로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주님의 뜻을 알고서도 상식에 따라서만 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순종하여 주님을 거스리는 일도 많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의 일을 하다보면 그 일이 타당하고 옳은 일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무리한 방법으로 급히 그 일을 이루도록 허락하시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어떤 사람이 그 일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격다짐으로 일을 밀고 나간다면 그는 생명에 따라 행하지 않고 선악과 아래 있는 것이다.

선악 아래 있는 자는 결국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고 선을 추구하려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아서 결국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죄만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지 생명의 반응을 제쳐두고 외부적, 객관적, 상식적 기준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 주님의 길은 오직 영 안에서의 평안과 기쁨으로 지시된다.

마태복음 17:1-5을 보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주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 베드로가 좋아서 초막을 셋 지어 살게 하겠다고 말한 것이 나온다. 이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베드로로 하여금 아무 말도 못하도록 막았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 시대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큰 종들로서 능히 말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표준은 율법도 아니요 선지자의 가르침도 아니다.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는 기름부음(그리스도)이 우리의 표준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가 옳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말을 들었느냐] 또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느냐]이다.

산상보훈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어떻게 제시되어 있는가? 거기서 주님은 우리가 객관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옳다고 인정되는 것만큼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지 않다. 오른 뺨을 맞을 때 상대의 오른 뺨을 치는 것이 정당한(도덕적) 차원의 對處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를 때리지 않고 참으면 매우 착한(종교적) 차원의 대처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 경우에 다른 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적 차원의 대처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나? 그것은 우리(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시는 주님의 생명이 그렇게 해야 만족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넣어두신 주님의 생명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서는 어떤 행동으로도 그리스도인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 산상보훈의 가르침이다.

산상보훈의 차원은 너무 높다고들 말한다. 그렇다. 그것은 주님의 생명의 수준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수준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평안이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생명의 법을 따라 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선악의 원리를 따라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전4:4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느니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다. 선악(자기 생각)을 따라 판단할 때 바울은 자기 행동을 쉽게 분별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런 기준으로 볼 때 자기는 별로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선악에 따라 사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가 옳았다고 감히 주장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심판석에서 우리는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시다. 마지막 심판 날에만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판단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7에서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노라"고 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 쉽게 행하고 쉽게 살려는 사람, 생명의 인도에 둔감한 사람은 빛 가운데서 행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남이 하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것 같아도 사실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참 신자라면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외부적이고 율법적인 표준에 근거하여 무슨 일이든 결정하고 행하지 말고 속에 있는 주님의 생명의 인도에 주의하고 그것에 의거하여 모든 일을 결정하고 행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주님의 생명이 믿는 자 안에서 지금도 역사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마음을 기울여 주님의 생명이 인도하시는 바에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생명의 인도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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