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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새로운 소망 / 창3:20-24

2010.05.03 15:04

이상봉 조회 수:3931

1.아담이 그의 아내를 하와라 부름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3:20)  

아담이 그의 아내를 하와, 곧 산 자로 부른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 아담이 자기 아내를 모든 산 자의 어미라고 칭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을 위한 조치에 대해 믿음으로 화답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약속하셨다. 이어서 하나님은 그들을 그때까지 보존하시기 위해 그들을 저주로 제한하셨다. 이러한 일련의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 아담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과 조치가 결코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하신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하신 은혜의 역사임을 인정하며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부른 것이다. 그가 자기 아내를 하와라고 부른 것은 다음과 같은 신앙 고백적 의미를 지닌다. "하와, 나와 당신은 범죄했으며 저주를 받았지만 그러나 죽지 않고 산다. 우리는 즉시 죽지 않을 뿐 아니라 나중에 죽더라도 영원히 죽지는 않을 것이며 다시 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녀들을 낳을 것이며 그리하여 산 자의 어미가 될 것이다."  

본래 여자의 이름은 아담이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1,2) 여기서 사람이라는 단어는 아담으로 되어 있다. 아담이란 사람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만 아담(사람)이 아니라 하와도 아담(사람)인 것이다. 성경은 필요에 따라 하와를 {여자}(이솨 - 남자는 이쉬), 또는 {돕는 배필}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아담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자기 아내를 하와라고 칭한 것이다. 아담은 아직 자기 아내가 아기를 배기도 전에 그를 어미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창3:15의 뱀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 곧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에 의거한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정말로 후손을 얻었다. 그것이 바로 가인이다. 그들은 죽지 않았고 약속대로 후손을 얻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그 아들이 바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일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으며 아직은 때가 아니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에 아들을 낳았을 때 "드디어 약속대로 구원자를 얻었다"는 심정으로 그의 이름을 {가인}, 즉 {얻었다}로 지었다. 그들이 가인을 구속자로 생각한 것은 옳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자를 소망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약속을 믿고 소망 중에 인내로 산 사람 중에 대표자는 아마도 아브라함일 것이다. 그의 이름은 처음에 아브람이었다. 이 이름의 뜻은 많은 자식들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86세때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버지로 짓게 했다.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17:1-6) 그러나 그가 실제로 얻은 것은 고작 이삭이라는 아들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열국을 얻을 것을 믿고 살았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4:19-22)  



2.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사람이 무화과 나무 잎으로 엮은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죄와 수치를 가리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선과 악을 아는 눈이 열려서 자신들의 상태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부끄럽고 더러운 상태를 가리려고 한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 없이 스스로 선악을 알게 된 것은 결코 지혜롭게 된 것이 아니다. 선악을 알면 선은 좇고 악을 피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악은 그것을 아는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것는 되고 만다. 하나님은 선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악을 모르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를 따르기만 하면 악은 행하고 싶어도 행할 수 없고 오직 선을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일단 악과 접하여 악을 알게 되면 악은 피할 수 없다. 악을 아는 한 악에 연루된다.

이때 하나님은 친히 짐승의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의 옷을 해 입히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타락하기 전에 사람에게는 구속의 피가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옷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식물의 생명을 사용하여 사람이 자신의 죄를 가릴 수는 없게 되었다. 이제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같이 생명이 있는 것이 죽어야만 했다. 식물도 엄밀하게 말하면 생명체이지만 성경에서 생명체는 피가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9:4,5)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레17:14) 그러므로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물이 죽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신 것은 아담이 3:20에서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부른 다음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이 모든 인류에게 당연히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를 입히기 위한 가죽을 얻기 위해서 양일지 모르는 그 어떤 짐승이 희생되어야만 했다. 아마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보는 가운데서 그 짐승을 죽이셨을 것이다. 이것을 본 아담은 하와에게 "저것이 바로 우리가 당해야 할 운명이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먹은 우리는 저렇게 죽어야 하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대신 저 짐승을 죽이고 피를 흘리시는구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대신 희생되는 저 짐승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라고 말했을 것이다. 주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례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외쳤다. 요1:29은 창3:21의 발전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지만 사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창세기 3:21에서부터 죽임을 당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 인류는 하나님의 이러한 가리우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아담이 범죄한 직후에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을 가리려고 한 것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 도덕과 교양과 문화로 자신들의 죄를 덮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 없이는 그 어떤 사람도 어떤 방법으로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의 원리를 거부하는 자는 죄로 인한 더러움과 수치와 썩어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3.에덴동산에서 내 쫓으심

(1)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에덴 동산에서 사람을 내쫓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만드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왜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게 하셨는가?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을 제한하고 보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고난, 곧 저주를 예비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예비하셨다. 사람은 이제 고난 중에서 장차 있게 될 구원을 소망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현재 형편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나중에는 구원을 받을지라도 현재는 분명히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해서는 안되었다. 나중에 구속이 성취되어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고 거룩함과 영광을 회복할 때 비로소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것이 허락될 것이다.  

(2) 수단

그룹과 화염(불)과 검이 사람을 막았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겔9:3, 히9:5 "영광의 그룹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을 막았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막은 것은 바로 사람 자신의 죄이며 롬3:23에서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사실이다.

화염은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다.(신4:24, 9:3, 히12:29)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합당치 않은 모든 죄 있는 것과 더러운 것은 하나님에 의해 소멸된다. 이 소멸하는 불은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하며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그 분을 보지 못한다.(히12:14)

검은 죽임을 상징한다. 칼은 심판의 도구이다. 심판은 의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인이 생명나무로 나아오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다.

(3) 결과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강림하셨다.(출19:10-20:21)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 오지 못하도록 경계하셨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출19:12,13) 시내 산은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으로 덮였고 거기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은 죄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분리시켰다.

또 그 전에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서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나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그리고 하나님은 그 후 성막을 두게 하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과 만나도록 정하셨다. 하나님은 백성들과 약속에 의해 지성소에 계시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지성소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하셨다. 오직 피를 의지하여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을 따름이다. 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는가? 거기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언약궤와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이루었는지를 감시하는 그룹이 언약궤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4) 시간적 한계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언제까지 막혀 있게 되었는가? 그것은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리기까지 막혀 있었다. 주님의 구속적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의 요구를 만족케 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접근하여 생명이신 그 분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上)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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