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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의 저주 (1) / 창3:16-19

2010.05.03 15:02

이상봉 조회 수:3716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하신 후 사람에게도 저주를 하셨다. 하와에게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하셨고, 아담에게는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다. 뒤에 아담에게 내린 저주는 두 사람 모두에게 내린 인류 공통의 저주이다. 이처럼 사람도 저주를 받았다.  

그런데 지난 주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곧 바로 저주하여 죽이시지 않고 그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이 여자의 후손을 통해 장차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복음을 전하시며 구원 역사를 시작하신 것을 보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또한 그들을 회복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부르셨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저주를 하셨는가? 사람을 용서하시고 받으셨는데,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셨는데, 왜 저주하시며 심판을 내리셨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이 현재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안팎으로 죄인인 것이다. 죄인을 죄인 아닌 것처럼 다룰 수는 없다. 밉고 곱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 하는 것이 다루심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전혀 죄와 상관 없는 자처럼 대하실 수 없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사람을 받으시는 것과 그들이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자들인 것처럼 대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람이 받은 저주의 성격

1.사람이 받은 저주는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런 결과이다. 사람의 고난은 사필귀정의 원리에 따라 그들의 선택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저주는 하나님께서 억지로 내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당연히 되어질 일을 알려주신 것에 불과하다. 꽃이 꺽어지면 그는 머지 않아 시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알려주셨을 따름이다.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일부러 꽃을 시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그들을 정죄하고 저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주의 진리대로 사람이 그들의 선택의 결과를 먹게 된 것이다. 이 말을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다만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죄의 결과는 먹지 않도록 억지로 역사하시지는 않은 것뿐이다.

이는 마치 이와 조심 없이 칼을 가지고 놀다가 손을 베인 아이와 같다. 칼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칼은 손이 베이기 쉬우니 가지고 놀지 말라고 하며 꼭 써야 하면 손을 베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라고 경고하혔다. 그런데 아이는 어머니의 말에 전혀 주의하지 않고 함부로 칼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손을 베었다. 손에는 피가 나고 상처로 인해 아이는 고통스러워했다. 어머니는 아이가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손을 다친 것으로 인해 마음이 아팠고 아이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를 별로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얼마나 아프냐고 위로를 했다. 이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한 것이다. 자 이렇게 되었을 때 아이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는가? 어머니가 용서를 했으니 아이는 손을 베이지 않은 것처럼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어머니가 용서를 했더라도 아이의 손에는 피가 나고 상처가 생겨서 아픔이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우주 가운데 정하신 법칙과 진리대로 되는 것이다. 손을 베면 피가 나고, 꽃이 줄기에서 끊어지면 말라 죽고, 아이가 부모를 떠나 가출하면 배를 곯고 병들며, 사람이 독을 마시면 죽게 되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면 무슨 결과가 오겠는가? 고난 가운데서 불행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억지로 사람을 벌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선택의 결과로 당연히 먹어야 할 열매를 먹게 된 것이다.


2.저주는 멸망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징계(단련)이다. 그러므로 저주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허락된 고난이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용서하셨는데 위에서 말한 저주가 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분명히 최소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이 죄의 결과를 깨닫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이다. 사람이 저주를 받은 것은 공연히 받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 죄가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그대로 두면 사람은 절대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이 받은 저주는 한편으로 분명히 심판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그것은 뱀이 받은 저주와 성격이 다르다. 뱀의 저주는 완전히 심판 그 자체였으며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철저한 멸망뿐이었다. 뱀에게 내려진 저주는 그것이 하나의 과정과 수단이 되어 더 나은 미래를 준비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저주는 일시적이고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성격을 띤다. 저주로 말미암아 생긴 외적 환경적 고난을 통해 내면에서의 변화를 기대한 것이다. 즉 사람이 고난 중에서 사탄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아야 집으로 돌아온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러므로 사람의 저주는 심판의 성격과 아울러 징계의 성격을 크게 띠는 것이다.

타락한 사람의 상황은 어떤가? 창4:7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죄가 사람을 삼키려고 문 앞에서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은 이런 형편에 놓여 있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의 노예이다. 자기 생각에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사탄에게 다 조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류에게 무제한적인 능력과 환경을 허락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완전히 죄로 망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죄인의 마음을 가진 현재 상태에서 현재의 모든 제한을 벗고 육체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무제한적인 자유와 능력을 가진다면 인류는 순식간에 죄 중에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죄인에게 있어서 지나친 자유는 죄를 키울 뿐 사람을 진정으로 자유케 하거나 하나님께로 돌아가 생명을 얻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죄인에게는 제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제한은 사람을 더 이상 범죄하지 못하도록 막고 보호하는 장치가 되며 사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받은 저주는 한편으로 하나님에 의해 예비된 은혜의 수단적 성격을 띠고 있다. 마약이나 알콜에 중독된 사람이나 도박에 미친 사람을 생각해 보라. 지나친 자유는 절제력을 잃은 그들을 멸망과 죽음으로 인도할 따름이다. 마약이나 알콜에 중독된 사람은 강제로라도 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 그래서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괴로운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약물을 끊고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큰 제한을 받았다. 지금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아이들이 부모의 잔소리와 지시, 통제와 간섭을 많이 받는 것은 부모가 그들을 싫어하거나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잘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크게 잘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죽지 않고 살게 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한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 어렵다. 만일 부모가 개구장이 아이들에게 아무 제한도 두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한다면 아이는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말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밥을 제 때 챙겨 먹을 줄도 모르고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줄도 모르고 절제할 줄도 모른다. 그러므로 제한 없이 내버려 두면 굶어 죽는지 병이 들어 죽든지 사고가 나서 죽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돈을 무한정 주어 보라. 그러면 살 것 같지만 죽는다. 그 아이는 단 과자와 콜라와 초코렛을 무한정 사 먹을 것이며 하루 종일 방에 들어박혀서 TV를 보거나 게임만 할 것이다. 그 결과 이가 썩고 밥맛을 잃어서 밥을 먹지 않게 될 것이고 병에 걸려 죽게 될 것이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시간과 돈과 가족, 직장이라는 생활의 제한이 없다면 모든 사람은 불규칙한 생활과 무절제한 생활,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생활로 얼마 안가 파국을 맞고 말 것이다.

사람은 어릴 때는 부모와 학교가 그의 제한이지만 어른이 되면 결혼 생활이 그의 제한이 되는 것 같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남편이나 자식, 시부모가 다 큰 제한이 될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런 제한들은 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불편하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는 내 곁에서 여러 모로 나를 제한하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 그리고 교회 형제들로 인해 감사한다. 아내로 인해 나는 여러 가지로 제한 받기 때문에 규모 있는 삶을 살게 됨을 느낀다. 또 그런 제한들로 인해 나의 악함과 인내 없음과 사랑 없음, 무능함을 깨닫는다. 그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아이들도 나를 제한한다. 아이들 때문에 나는 이기적이거나 방종할 수 없다. 나는 아이들의 부모로서 본이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실제 아버지로 선생으로 만들어나감을 느낀다. 또 부모님들로 인해 나는 종종 제한을 받는다. 특히 아버지는 많은 부분에서 내가 아직도 어른이 아니고 철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시는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여러 가지로 제한하신다. 이것은 내가 성인이 된 현재 직접적으로 나를 간섭하고 책망하는 유일한 제한이다. 이것은 나에게 많은 불편을 주지만 한편으로 큰 도움을 준다. 또 교회 형제들도 나를 제한하는 또 하나의 환경이다. 여러분들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살지도 못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주위의 사람들이 큰 제한 요소가 되지만 돈과 시간도 나를 제한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사실 나는 별로 불필요한 일을 하거나 죄를 크게 짓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돈과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점이 더 큰 것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워 놓으신 적당한 가난과 바쁜 일과는 나에게 유익하며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든다. 물론 성령님 아래 있지 않는 사람들은 돈이나 시간이 없어도 억지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지만.  

또 이런 외부적 환경 뿐 아니라 나의 약한 육체적 상황도 나를 제한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나는 몸이 그리 튼튼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대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로 인해 육체의 정욕이 제한을 받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이처럼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조성하신 모든 제한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며 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나는 이 때문에 우리가 처한 모든 열악하고 고통스런 환경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런 필요를 깊이 인식한 나머지 나는 어떤 경우에 일부러 나 자신에게 여러 가지 제한을 두기도 한다. 내가 약한 부분을 감지하여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몇 가지 제한 장치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죄를 미리 경계해 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 문제는 모든 사람이 시험에 들 수 있는 중대한 시험 거리이다. 이로 인해 사람이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철저하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사역을 함에 있어서 적어도 두 가지 원칙을 세워서 그대로 하겠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직접 돈을 받으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므로 비록 사람으로부터 공급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손을 거쳐서 그것이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의 사도들과 신앙 선배들이 이미 쓰던 방법이다. 누구든지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고 감동된 사람들이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고 자기 가진 것을 공급하고, 받는 사람은 그것을 누구한테서 받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에 내게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사람을 의지하며 월급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약한 나의 형편을 감안할 때 그런 제한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둘째로 나는 복음을 전한 대가로 돈을 받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복음을 전한 대가로 그 즉석에서 수고비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일부러 돈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받으라고 강제로 주는 것을 억지로 싸워가면서 거절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것을 90%이상 지켰는데 10%는 상대가 돈이 아닌 선물을 하거나 받지 않을 수 없는 상대편의 사정을 고려하여 받았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날 돈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돈 때문에 사람을 편향적으로 대하고 말씀 증거가 왜곡되며 많은 시험을 받기 때문이다.      

돈과 명예와 이성의 유혹 갖가지 죄의 시험들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의 의지적 노력만 가지고는 안되며 환경적 제한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과 형제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경계하고 죄를 짓기 어려운 환경적 제한(틀)을 짜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게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장애물을 설치해 놓은 것을 감히 거스리고 죄를 짓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이런 일을 도우신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다윗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고난과 제한이 어떻게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하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삼하12:10-14)

다윗은 밧세바 사건 후에 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는 범죄에 대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환난이 그의 생애를 통하여 그를 끊임없이 따라 다녔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그를 진리 안에 묶어 두려는 하나님의 징계이며 훈련이었다. 그것이 결국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싸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승리와 능력으로 친히 수행하신다.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기고 진리 안에 서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은 환경을 이용하신다. 그는 우리의 약함을 고려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환경적 도움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환경을 고난과 제한이 있는 환경으로 조성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성도의 삶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무능하고 연약함 또는 환경적 어려움으로 인해 실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그 모든 육체적, 환경적 제한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손길을 펴신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누구나 다 제한을 받기는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두신 것은 그것이 사람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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