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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가인과 아벨 (창4:1-7)

2010.05.03 15:05

이상봉 조회 수:4095

1.가인을 낳음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다. 이 이름의 뜻은 [얻었다]는 것이다. 특히 하와는 그를 낳고 난 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자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처음에 아담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때 그의 아내를 '하와' 곧 '살았다' 라고 부름으로써 그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했다.

하와는 아마도 그의 아들이 창세기 3:15에서 약속된 바로 그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은 약속된 여자의 후손이 아니었다. 약속된 자손은 오랜 세월 후에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하지만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는 약속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할 한 사람을 보내주실 것을 기대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범죄했으나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들의 믿음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인류의 상태를 바로 보아야 한다. 지금 모든 인류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죄로 인해, 또 그로 말미암아 사람 자신과 땅에 내려진 저주로 인해,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사람은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며 그것을 조금씩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이 만일 동물처럼 먹고 목숨을 부지하기만 하면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인류는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그것마저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람은 밥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해서 당연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다. 이것이 동물과 인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이다. 이 마음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으로 산다고 하려면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삶의 기본 조건이다. 이것이 없는 삶, 곧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 세상에는 진정한 평안이라고는 없었다. 사람의 마음에 이기심과 탐욕이 가득차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서로 간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끊이지 않게 되었고, 또 그로 인해 갈등을 겪고 전쟁을 하고 그로 인해 마음에 병을 얻고 육체에 질병과 상처를 입게 되고, 거기다가 홍수와 가뭄과 지진과 병충해와 전염병과 각종 재난으로 기근과 참사가 생기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살고 있다. 여기서 하루 하루 힘겹게 목숨을 이어가는 것을 참으로 산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가운데, 곧 저주와 재앙이 시작된 첫 순간에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아내를 하와라고 부름으로써 그리고 그의 아들을 가인이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붙잡았다. 그 결과 그들은 한 번은 죽었으나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들은 범죄의 당사자가 아닌가? 그래도 약속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들은 살았다.

오늘 우리도 아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 저주와 고통과 죽음이 있으면 구원과 평안과 생명도 있다. 사탄이 있으면 하나님도 있고 사탄의 거짓말이 있으면 하나님의 구원 복음도 있다. 아담이 타락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타락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타락은 사람이 한 것이지만 혼자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도 사람 자신이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지만 자신이 노력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여자의 후손이 구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이런 저런 문제와 고통을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자신이 안고 가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체념적인 것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능력을 과다하게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은연중에 내가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거기서 나올 수 없듯이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뿌리치고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원해서 들어간 길이 아니면 내 스스로 나오기도 어려운 것이다. 내가 스스로 들어갔다면 나올 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 전격적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데서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나는 죄를 많이 짓고 문제가 많은 사람이니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범죄의 당사자인 아담과 하와는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무슨 자격으로 살기를 기대했으며 무슨 자격으로 아들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에게도 자격은 없다. 오직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은혜로 그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죄인이 되었든, 살인자가 되었든 하나님이 살게 하시면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니 우리는 다만 받는 것이다.


2.가인과 아벨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창4:2)  

아담과 하와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범죄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 저주 가운데서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망 중에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살았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가인과 아벨을 낳아 길렀다. 그들은 그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아담은 아들들에게 이 저주받은 땅 덩어리 자체에 소망을 두고 열심히 하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가르쳤을까? 마치 사람 자신과 세상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자신들의 미래는 무조건 밝다고 가르쳤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 때문에 사람이 그 지음받은 자리에서 타락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사람은 저주를 받아 죽음을 기다리는 자리에 처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탄을 박살낼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가인과 아벨에게 전했을 것이다.

특별히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미 시행하시기 시작하셨는데 그 첫 일로 짐승의 가죽을 벗겨 자기들에게 옷을 해 입히셨다는 사실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바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저주의 실제성, 인간의 벗음과 하나님의 입히심의 필요성, 그것을 위해 대속적 죽음을 죽어야 할 희생 제물의 필요성에 대해 그 아들들에게 분명하게 증거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에 대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고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아는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이다.(롬10:14,17)

그러므로 아담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들었고 이것을 또한 그 아들들에게 전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 아들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3.가인과 아벨의 제사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4:2-5)  

가인과 아벨은 제사를 드렸다. 본래 제사라는 것은 인간 자신의 필요를 위한 행동은 아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노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지만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누군가의 특별한 요구나 지시가 없다면 하지 않을 일이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그들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의 빛을 전해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아담이나 그 아들들이나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제물 역시 인간 자신의 기호나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선정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바에 따라 선정되어 드려져야 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제사를 드렸다. 그들의 제물은 그들의 직업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아벨은 양치기였으므로 양을 드렸고 가인은 농사꾼이었으므로 곡물이나 채소나 과일을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직업이다. 가인이 농사하는 자라는 사실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것은 먹고 살기 위해 당연히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힘들여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인은 농사를 짓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벨은 양치기였다. 그는 농사지을 필요가 없었는가? 그도 먹고 살아야 하므로 농사를 부분적으로는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직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양을 기르는 일이었다. 아벨의 시대에 양은 사람의 음식이 아니었다. 홍수 전에는 식물이 사람의 음식이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 오직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동물을 사람의 음식으로 주신 것이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9:3)  그러므로 아벨은 양식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그 일을 직업삼아 한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고 힘을 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길을 위해 일을 하고 인생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저런 직업을 가지고 살지만 그런 생업이 우리의 참 직업은 아니다. 우리의 직업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가 다 그렇다. 다른 일들을 생계를 위해 필요에 따라 하는 것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이란 가정을 꾸리고 그것을 잘 돌보며 직장 생활을 잘 하며 그런 가운데서 틈을 내어 교회 생활과 신앙 생활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형제들이 뜨겁게 사랑하고 교통하며 온 힘을 거기에 쏟는 것을 광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섬기며 따르며 전하는 것은 모든 성도가 항상 수행해야 할 당연한 의무요 일(직업)이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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