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창세기

사람의 저주 (2) / 창3:16-19

2010.05.03 15:03

이상봉 조회 수:3686

여자가 받은 저주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

여자가 받은 저주의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1.잉태하는 고통이 더함

첫째 저주의 내용은 여성에게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해진다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말은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다. 그러면 잉태하는 고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여성이 아이를 가지게 되고 낳는다는 사실 자체가 저주의 산물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창1:28에서 하나님은 그 지으신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꾸 다시 만들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사람이 자녀를 낳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축복의 산물이지 저주의 산물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잉태하는 일에 고통이 가해진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생육과 번성과 관계되는 모든 일이 쉽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고통과 수고가 따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즉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일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즉 타락하기 전이라면 하와는 아이를 가지는 일과 낳고 기르는 일에 그렇게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이 따르는 일일 뿐 괴로움과는 무관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생명의 확장이요 충만이며 사람 자신의 기쁨과 영광이 증대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충만하게 드러나는 일이므로 출산과 양육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모든 일이 순조롭고 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한 후 인간은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저주스러운 상황 속에서 살아야 되게 되었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 속에 있는 죄(사탄)와 싸우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싸워야 하며 또하나 환경과 싸워야 하며 다른 죄인들(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인생은 이제 처음부터 끝까지 안식과 평안이 아니라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 되게끔 되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든 과정에서 부모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낳을 때도 여성에게 고통이 따르지만 죄 안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클 때 더 많은 고통과 수고를 안겨 준다. 아이는 자라나면서 계속 부모에게 우려를 끼치며 그들의 계속 되는 죄와 허물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맛보도록 만들 것이다.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것에 대한 저주는 일차적으로는 여자에게 내려진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아담을 포함한 부모 모두에게 내려진 것이다. 생육의 고통은 부모가 함께 지는 것이다. 이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단지 축복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저주가 포함된 일이 되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신 것은 그것을 통해 사람을 완전히 망하도록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고난과 환경적 제한을 통해 사람을 훈련하시고 징계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원리에 의거하여 여자가 아이를 낳고 기를 때 고통을 겪도록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도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생명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며 번성도 충만도 없고 안식도 축복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상 자녀들은 평생동안 부모에게 고통을 끼친다. 그것은 자녀들이 부모의 속을 썩이는 일을 적극적으로 함으로써 그런 점도 있지만 부모 스스로가 자기의 자녀들이 한 연약한 인간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연약함과 죄성으로 인해 안타까워하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치게 하면서 하나님은 부모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12-15)

위의 의미를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 속에서 여자들이 해산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누구든지 고난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생명의 축복을 회복할 수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고난은 보약과 같다. 모든 환경적 육체적 제한은 단지 인간을 제한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난과 제한과 죽임을 통해서 더 살고 더 자유케 하며 완전한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 5월 8일은 어머니날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더 자녀와 관계하여 더 많은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성에게 이런 수고와 고통이 주어진 것은 여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이다. 실제로 오늘날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더 많이 구원받는다. 교회에는 여자가 남자의 두 세배 이상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여성들이 더 낮고 더 고난을 많이 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조치의 의미를 깊이 아는 사람은 덮어 놓고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많이 낳기만 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녀를 많이 낳았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다. 즉 무슨 多産의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성적 욕구로 인해 자녀가 계속 생기는 것을 어떻게 조절할 수 없어서 생기는대로 많이 낳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자녀가 많이 생기는 것을 크게 불행한 일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녀들을 통해 자기의 생명이 확대되고 연장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키울수만 있다면 자녀들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을 했다.

요즘은 반대로 자녀들을 많이 낳지 않으려고 한다. 그 까닭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아이들을 키우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오늘날처럼 그렇게 많은 힘을 들여서 양육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저 밥이나 먹이고 병들지 않도록 보살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많은 교육을 시켜야 하고 더 위험하고 어려워진 환경에서 큰 힘을 들여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옛날보다 힘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많이 낳지 않으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예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유럽과 같이 살기 좋아진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서 인구가 줄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축복이고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저주이다. 저주는 일부러 자취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저주는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피해서는 안된다. 고난과 징계를 받기 위해 일부러 결혼을 하고 일부러 아이를 여럿 낳아서 힘든 삶을 살 필요는 없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다른 이유들로 인해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괴롭게 생각하고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 들여서 유익을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고난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아이를 많이 낳아서 기르겠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생각이며 힘이 드니 아이를 낳지 않거나 하나만 낳겠다고 하는 생각도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생각이다. 이런 일은 다 크게 잘못되거나 이상한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상식만으로 행해서는 안된다. 아이를 많이 낳든 낳지 않든 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해야 한다. 사람이 성령의 인도 없이 인간적인 욕심이나 무작정 자녀를 많이 낳아서 기르겠다고 하는 것은 탐욕과 무지의 소산이다. 무능하고 죄인인 인간이 자녀를 많이 낳아서 기르겠다는 것은 거기에 얼마나 고통과 눈물이 뒤따를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의 죄를 모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가운데서 생명을 낳고 확장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깊이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웨슬레의 어머니는 아이를 열아홉명이나 낳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목사였다. 자녀들은 먹을 것도 별로 없는 가운데서 매우 가난하게 자랐다. 그러나 그 어머니 수잔나는 자녀들을 잘 양육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다. 그러므로 많이 낳고 적게 낳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시대적 환경으로 그렇든지 다른 이유로 그렇든지 자식이 많이 태어났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열 아홉 명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기왕에 태어난 자녀들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은혜 가운데 잘 키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 일을 해야 한다. 생육의 축복스런 측면과 저주스런 측면을 다 같이 바로 보고 자녀를 낳고 양육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덮어 놓고 자녀들을 여러 명을 낳아서 기르는 것과 특히 아들을 얻기 위해 탐욕으로 자녀들을 여러 명 낳았던 것을 지극히 어리석고 잘못된 일로 생각한다. 악하고 무능한 인생이 자신과 환경에 미친 여러 가지 저주와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덮어 놓고 자녀들을 낳은 것은 생명의 축복을 향유하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반대로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이기적인 생각으로 결혼을 아예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고 편히 살려고 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5:13,14)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기가 어렵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유익한 일을 하기에 바빠서 결혼 생활이나 자녀들에 매이는 것을 유보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할 일이 없어서 죄나 지을 판이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그의 인생을 훨씬 덜 부패시키고 그의 영혼에 유익할 것이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1-33)

바울의 경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편으로는 결혼을 할 것을 권했지만 한편으로는 결혼을 하지 말 것을 권하기도 했다. 물론 은사와 형편을 따라 할 일이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주님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섬길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서 죄나 짓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혼의 유익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바쁘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7:8)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7:25-28)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7:24-40)  

모든 일에는 다 그 나름대로 유익이 있다. 그러나 저주는 어디까지나 저주이다. 비록 그 안에 성도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일부러 그 저주를 자취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정상적인 인류를 위한 최상의 길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위한 차선의 길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 고난을 당하고 거기서 유익을 얻겠다고 할 필요가 없고 오직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만나는 여러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달게 받아서 단련을 받을 따름이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