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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생명의 길을 따라 행함 / 창2:18-25

2010.05.03 14:57

이상봉 조회 수:3627

우리는 전 시간에 혼의 잠재력에 대해 공부했고 사탄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이 혼의 잠재력을 계발하여 사용하도록 부추겨서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 아담의 실패 때보다 더욱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을 거슬리어 행하도록 만들려고 하는 시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모든 것은 사탄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따라 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생명 나무의 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선악을 아는 지식 나무의 길은 하나님과 형제들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다. 육신(몸)의 생명도 몸밖의 환경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잠시라도 독립하면 죽고 만다. 우리는 코로 그리고 피부로 숨을 쉼으로써 바깥의 공기를 마시고 내뿜어야 하며 물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찌꺼기를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 심지어 요즘에는 땅(흙)과 신체가 접촉을 하지 않으면 병이 생긴다고 하여 흙을 밟고 살아야 하며 시멘트가 아닌 황토 위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을 본다. 우리의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한 생명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하와와 함께 살도록 지어졌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지어졌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악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하는 지식 나무의 길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지식 나무를 붙잡는 한 남을 정죄하고 분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선악을 따라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자기 아닌 모든 환경이 불만스럽게 되고 싫어지며 결국 그것들을 정죄하고 배척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두 노선 중 한 노선을 따르게 되어 있다. 타락한 후 모든 사람은 선악을 아는 지식 나무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들의 후손은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기 지식만을 의지했다. 창4장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환경에서 살 길을 찾기 위해 문화를 일구었다. 이 문화는 노아의 심판 때까지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이 되면서 계속 발전되었다. 그러나 기술과 물질적 삶의 상태가 나아질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황폐하게 되어 마침내 멸망당하고 말았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홍수로 땅을 심판하셨다. 노아는 살아났지만 노아의 후손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또 다시 바벨탑과 바벨성을 쌓음으로써 새로이 하나님 없는 인간 왕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생명 노선을 따를 자로 삼으셨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이미 사람에게는 생명 나무의 길을 따르는 것과 선악을 아는 지식 나무의 길을 따르는 두 노선이 있었고 사람들도 둘로 나뉘어서 이 두 길 중 하나를 걸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락되었다가 회복된 아담으로부터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믿음으로 전진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소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 노선을 걸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반대로 가인에게서 시작되어 경건하지 않은 수많은 대부분의 인류가 바로 지식 노선을 걸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생명 노선 안에서 셈의 장막과 아브라함의 장막과 성막과 성전을 본다. 거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지식 노선 안에서 우리는 에녹성과 바벨과 소돔과 바로의 국고성, 그리고 생명 노선을 뒤엎으려고 했던 바벨론을 본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똑같은 두 노선을 본다. 구약과 율법이 원래는 생명 노선 안에 있었지만 유대 종교인들이 그것을 지식적으로 대하여 지식 노선에 속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을 지식적으로 사용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다 지식 노선을 따르고 있었으며 오직 주님만 생명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그 후 주님은 많은 사람들을 생명 노선으로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생명을 따라 행하는 무리들 즉 교회가 생겨났다. 그러나 얼마 후 교회는 타락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죽은 성경 지식과 제도와 전통으로 떨어져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참 교회는 영원히 생명 노선 안에 있는 것이지만 겉으로 드러난 종교로서 기독교는 죽은 지식 노선 안에 있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큰 종교적 바벨론이 될 것이며 세상은 큰 정치적 바벨론이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바벨론은 하나님의 노선과 반대되는 위치에 놓여 있는 세상이며 이들의 행동 원리는 오직 선악을 따라 행하는 지식 나무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따라 행하는 일의 어려움 때문에 지식 나무의 길로 떨어졌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성령을 좇아 행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곧 이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새 예루살렘이 드러나는 마지막 날까지 생명 나무의 노선을 지키는 자들이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나님의 생명의 인도를 따라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상식과 선악을 아는 지식에 따라 판단하고 행하는가? 생명의 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그 길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호하게 행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 노선을 걷는 사람은 자신이 생명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사망은 간교한 것이기 때문에 사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망으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탄에게 속한 거짓된 길, 사망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사망은 지식으로 포장되어 교묘하게 사람을 속인다. 생명은 다만 생명이다. 그 내용 본성 결과가 다 생명이다. 그러나 사망은 지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지식으로 포장된 사망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계속 질문을 하며 자기들의 지식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한다. 하나를 대답하면 또 다른 질문을 하며 그 질문과 궁금함은 끝이 없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그리스도인들도 지식을 탐내는 사람이 많다. 지식 자체는 물론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은 자기를 지혜롭고 유능한 존재로 만들어 하나님 없이도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가 되려고 무의식 중에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누림 없이 성경 지식만 계속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생명 없는 말씀은 곧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이 문자가 될 때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된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분리될 때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은 그 자신에게 무용할 뿐 아니라 남을 죽이는 것이 되고 만다. 종교의 특징은 살아계신 하나님은 없이 그리스도와 분리된 성경과 제도와 전통과 일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망이 결코 악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도리어 많은 선한 것들 아래 숨겨져서 좋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탄의 간계로 인해 넘어졌다. 강도 짓을 하고 도박을 하는 것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경계한다. 그러나 종교 활동을 하고 선한 사업을 하는 것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경계 없이 덤벼들기 쉽다. 그러나 사탄은 그런 선한 것 아래에 사망을 숨겨 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에 창세기를 공부하기 전에 요한복음을 공부했다. 거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삶에서 한 특징을 살펴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셨을 때 결코 지식을 따라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반응을 좇아 행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할 때 주님이 유대교의 저명한 선생처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식적 설명으로 명쾌하게 설명하셨더라면 많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오해하거나 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예컨대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 장소를 물었을 때도 여자의 질문에 맞게 그 장소가 그리심산이라든지 아니면 예루살렘성전이라든지 이것이다 하고 대답을 하셨을 법 한데 그렇게 대답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만 하셨다. 이는 주님의 관심이 사람들의 관심과 전혀 다른 데서 나온 대답이다. 주님은 관심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서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생명에 있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관념에 따라 죄가 있으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주님께 물었다. 그러나 주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고 답하심으로써 누구의 죄 때문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가 주님을 만났으므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임을 나타내셨다.

니고데모가 종교적인 가르침을 얻으려고 주님께 왔을 때도 주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나 지식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인 것이다. 사람들이 주님께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라고 했을 때 주님은 그것을 따라 행하시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들라고 했을 때 그는 그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스스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동생들이 주님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요구했을 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들이 올라간 후 주님은 스스로 그렇게 했다. 또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서도 주님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을 더 묵은 후 그리고 가셨다. 그때 제자들은 유대인들로 인해 그리고 다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주님은 가셨다.

이것들은 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주님이 선악을 따라 상식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지식의 책이 아니라 전적으로 생명의 책이다. 사람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나아와서 생명 노선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이 쓰여진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주님은 제자들이 선악을 따라 행하는 지식 나무의 노선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엇이든지 다소 답답하더라도 지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인도를 따라 행하도록 훈련하시기 위해 모든 질문과 행동에 즉답즉행을 피하신 것이다.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식이나 종교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임재 없이도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생명을 따라 행하면 우리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없이 지식만 따라 행하면 우리는 생명이 없게 된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어떤 방법이나 형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 생명의 원칙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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