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받은 저주
2.남편의 다스림을 받음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가 받은 저주의 두 번째 내용은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라는 말은 얼른 생각하면 여자가 타락 후에는 남편을 사모하게 된다는 말처럼 생각되기 쉽다. 일반적으로 사모한다고 하면 좋은 의미에서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모는 그런 뜻이 아니다. 여기서 사모란 단지 여자가 남편에게 어떤 강렬한 열망을 가진다는 정도의 말이다. 문제는 무엇을 열망하느냐 하는 것이다. 타락 후 여자가 남편에 대해 가지는 강렬한 열망은 바로 남편을 자기 손에 넣고 지배하고자 하는 정복욕이다.
타락한 인간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창4:7 말씀이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재물이 열납되지 않음으로 인해 분노하고 있는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고 하셨다. 이 말씀은 타락 후 사람이 처한 환경을 보여주는 말씀인데 이제 죄는 사람을 삼키려고 문 앞에서 도사리고 있는 지경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무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죄가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릴 위험에 항상 노출 되어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탄의 시험에 빠질 지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탄 간의 이런 관계는 남자와 여자 간에도 재현된다. 여자는 항상 남편을 정복하려는 소원(사모함)을 가지고 있다. 이는 죄가 가인에게 가지고 있는 소원과 같은 것이다. 타락 후 여자는 항상 남편을 소유하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는 뱀의 말을 들을 때 자기가 스스로 머리가 되어 판단하고 결정한 것처럼 항상 남편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스스로 머리가 되어 모든 것을 하려고 한다. 그는 남편을 정복하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탄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편이 그런 여자의 시도에 굴복되지 않고 도리어 강력히 여자를 다스리고 지배하게끔 정하셨다. 죄의 유혹을 받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죄에게 지배를 받지 말고 도리어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남자에게도 여자의 지배를 받지 말고 다스리고 지배하도록 하셨다.
타락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파괴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파괴시켰고 또한 남편이 아내를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을 파괴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는 서로 힘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사랑하고 순종하려 하지 않고 힘으로 상대를 지배하고 제압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쉽게 상대를 그렇게 하지 못한다. 오직 싸워서 이긴 사람이 그렇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힘겨루기에서 일반적으로 여자에게 불리하도록 저주를 내리셨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똑 같다. 여자나 남자가 능력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여자는 모든 영역에서 대체로 남자에게 눌리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안다면 여자는 모든 힘을 다하여 억지로 남자를 누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다. 뒤에 살펴 보겠지만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에게 임한 저주는 삶의 수고이다. 그러나 삶의 수고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다.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를 섬기는 일에 힘쓰는 것이 참으로 살 길이 될 것이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갈등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결된다고 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2-24)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5:25-30)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1-33)
하나님이 처음 정하신 것은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는 것, 즉 주장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아니고 남자가 여자를 힘으로 다스리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처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여자가 받은 저주에서 풀려나는 길은 둘 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관계 회복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날 때 사람은 더 이상 투쟁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복종할 수 있다.
오늘날 여성 문제나 기타 힘 없는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여성 해방 운동이나 노동 운동 등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지위를 무너뜨리고 여자가 그 자리에 오르면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힘은 힘을 부를 뿐이다. 그러나 힘은 어디까지나 본래부터 그런 힘을 더 가지도록 정해진 사람들에게 언제나 더 있기 마련이다. 여자보다는 남자, 무능한 사람보다는 유능한 사람에게 힘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런 힘의 구조를 일시적으로 혁명이나 어떤 방식으로 뒤집어 엎는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여성이나 어린 아이 또는 노예나 식민지 백성들과 같은 눌리고 약한 자들의 지위를 사회의 구조적 개혁을 통해 향상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해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실패는 곧 우리에게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하기 전에는 그 어떤 훌륭한 제도도, 혁신적이고 근본적인 구조 변화도 평등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남자와 여자의 갈등 문제나 해결되고 여성의 지위 향상이 이루어지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성령님이 사람을 변화시킬 때 사람은 헛되이 싸우지 않게 된다. 누구든지 소망이 세상에만 있다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제한된 세상에서 남보다 편히 살고 쾌락과 권세와 영광을 누리려면 남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뺏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고 그 위에 올라서지 않으면 남 달리 잘 살 수는 없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얼마든지 여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복종하며 섬길 수 있다. 이처럼 여자가 받은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풀릴 수 있는 것이다.
남자가 받은 저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남자에게 내린 저주는 모두 외적 환경과 관련된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저주한 내용은 없다. 첫째, 하나님은 땅을 저주하셨다. 그 결과 땅은 사람에게 결코 만만하게 양식을 내어주지 않게 되었다. 환경의 변화가 첫째 저주인 것이다. 이제 사람은 많은 수고를 하고서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저주는 사람 자신에게 내려진 것이다.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몸이 약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 저주는 그 약함이 극에 달할 때 사람이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다. 땅도 척박하게 되었지만 사람의 몸도 함께 약해져서 사람은 사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몸은 이제 종종 피곤함을 느끼고 병들고 사고를 만나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는 어느 순간에 가서는 드디어 전혀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죽음은 죄로 인해 인간이 지옥에 떨어져 멸망을 받는다는 궁극적인 인류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땅의 모든 축복을 더 이상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그 최종적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사망은 이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이루어졌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미리 정하신 바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원칙에 의해 즉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시 선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삶의 여건이 어떻게 어렵고 고통스럽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죄로 인해 사람의 외적 환경을 저주하셨는가? 우선 사람 자신, 곧 사람의 영혼은 이미 죄로 인해 선악과를 먹는 순간 죽었으므로 더 이상 심판할 것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무지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진리는 없고 선보다 악을 더 많이 추구하게 되었다. 여기에 하나님은 환경적 심판을 더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과 환경에 저주를 내리신 궁극적 이유는 사람의 영혼과 몸과 그의 환경이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분명히 죄는 사람의 영혼이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몸은 영혼의 지배를 받으며 환경은 사람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 모두는 하나인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영혼은 몸에게 영향을 받으며 몸은 또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환경과 사람의 몸을 치면 사람의 영혼도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거기에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 사람은 왜곡되고 타락했는데 환경은 여전하다면 인간은 죄 가운데서 영생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고 돌이킬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평생 그의 저주받은 몸과 환경을 보면서 그것을 증거로 삼아 자신의 죄인됨을 항상 깨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환경을 어렵게 만드셨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보는가? 낙관적으로 보는가? 비관적으로 보는가? 이 문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세상은 그리고 인간 삶은 결코 좋아지지 않는다. 더 나빠지면 나빠지지 결코 더 좋아지지는 않는다. 인간 삶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고통과 슬픔이 가득하고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를 몸에 짊어지고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 다만 고통의 형태와 내용이 바뀔 뿐이다. 과거에는 이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오늘은 저것이 문제가 되고 내일에는 또 다른 것이 문제로 등장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삶이 항상 고통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70년이나 80년을 살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다만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저주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즉시 죽으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저주를 안고서라도 얼마간 살게 하셨다. 이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무엇인가? 사람이 때로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때로는 불행을 느끼며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땅에서 일정한 시간을 살기는 살되 땅에다 모든 소망을 두지 말고 타락한 현재의 삶에 모든 것을 걸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안에 있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며 살라는 것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3-10)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욥7:1,2)
인류는 인생에 대해 때로는 낙관론을 때로는 비관론을 가져왔다. 20세기 초까지 몇 백년 동안 인류는 대체로 세상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2차 세계 대전을 치르는 동안에 그런 생각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동안 왜 사람들은 낙관론을 가지게 되었는가?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의학이 발전하고 문명화가 진행되고 경제가 발전하여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사람의 삶이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분명히 어떤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그만큼 절대적 상대적 빈곤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전에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고통과 슬픔을 맛보게 되었다.
이런 문제는 현대에 들어와서 새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인류가 항상 겪어 온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고통은 없어지지 않으며 오직 그 형태와 내용을 바꿀 뿐이다. 인간 삶의 발전이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삶의 궁극적인 변화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대체로 윗 세대의 고생스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인생에 있어서 전쟁이나 재앙이나 이런 저런 고통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정상이고 전쟁이나 기근이나 각종 재앙과 고통이 생기는 것을 이상한 일로 비정상적인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그 반대이다. 역사상 문제가 없는 때보다 문제가 있는 때가 훨씬 많았으며 평안할 때보다 싸울 때가 훨씬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죄로 인해 인류에게 처음부터 있어온 저주스런 삶의 상황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들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거나 그것을 거부하고 피하려고 하다가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3:1-13)
우리는 인생을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상황에 두셨으며 그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바로 보아야 한다.
추운 겨울에 전쟁터에 나와서 눈 구덩이 속에서 총을 들고 적과 대치하고 있는 군인을 상상해 보라. 그의 상황이 바로 인류가 보편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왜 나는 집도 있고 먹을 것도 있는데 따뜻한 방에서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지내지 못하고 이 추운 날 눈 밭에 엎드려 손발이 언 채로 엎으려 있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남을 죽여야만 하는가? 꼭 이래야만 살 수 있는가?" 우리도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저주하신 말씀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는 말씀을 하신 그대로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마치 남을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것처럼 전쟁을 하고 살았다. 그들도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반사로 그런 일을 했다. 과연 사는 것은 그렇게 힘든 것인가? 곡 그렇게 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가?
그런데 그 군인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적의 총알이 날아와서 그를 땅에 쓰러 뜨리고 말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놀랍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대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 전쟁이 다반사라면 죽는 것도 다반사인 것이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두려워하거나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범죄 이후 모든 사람에게 있을 것으로 이미 정해진 고통이나 죽음이 아니라) 그런 것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모르거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