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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가인의 어그러진 길 (1) (창4:8-26)

2010.05.03 15:06

이상봉 조회 수:5421

창세기 4:8-26

가인 - 자신을 위해 일하고 산 사람, 땅을 섬긴 사람

가인은 생계를 위해 땅을 섬기는 자였다. 사람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땅을 갈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거나 삶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된다.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답게 거룩하고 권세 있게 살아야 한다. 먹는 것은 그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땅을 갈고 밥을 먹는 것도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누리면 되지 섬길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타락한 인간의 길을 수정 없이 걸어간 가인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육신)를 위해 살았으며 자기가 정한 방식대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에 의해 살았다. 그러나 자신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자신이 아니고 마귀이다. 타락한 인간 속에는 마귀가 역사하고 있으므로 가인은 악한 자 곧 마귀에 속한 자로 산 것이다.
1. 사탄에게서 온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섬김
가인의 잘못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볼 때 가인은 그다지 잘못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는 단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겼을 따름이다. 없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지 않는가? 그는 농사를 지었고 그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열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는 자극을 받아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동생을 시기하여 죽였다. 그러므로 이 일의 책임은 지나치게 가인을 까다롭게 대하신 하나님께도 상당 부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인은 사실 하나님께 크게 범죄했다. 그의 동생 아벨과 그의 행동을 대조해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 그의 양을 제물로 드렸다. 아벨이 양을 친 것은 사람 자신의 생계적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 즉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그의 동생이 소중히 여긴 그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했다. 이것은 곧 그가 그의 죄를 경히 여겼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죄로 인한 저주와 구원의 복음을 경히 여겼음을 의미한다. 가인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우습게 안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무 것이나 바치면 고맙다 하고 넓죽 받아 드시는 분이 아니다. 가인이 별 생각 없이 저주받은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것은 사람이 자기의 죄악과 저주받은 일그러진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 오면서 '내가 아름다우니 나를 받으시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다. 마귀를 안고 있는 자가 하나님과 그대로 연합하겠다는 것은 너무도 하나님께 대해 무지한 것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 창세기 4장에는 마귀가 없다. 오직 우리는 거기서 거짓말하고 헛되이 분노하고 살인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인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8:44에서 주 예수님은 그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살인하고 거짓말하는 자는 마귀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주님께 공연히 분노하고 거짓말하며 주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일3:12)  더 나아가서 요한일서 3:12에서는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하셨다. 가인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 이미 사람의 형편은 억지로 마귀를 부르지 않아도 마귀가 문 앞에 와 엎드려 대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마귀의 말을 들을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한 자에게 속하여 마귀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때로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그것을 적극 제지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라고 한다. 그러나 간교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기되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서 벗어나서 헛되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추긴다.
우리는 이것을 크게 조심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 어디로 말미암았느냐 하는 것이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일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열심 있는 신자들의 문제는 세상에 빠진 신자들이나 게으름뱅이 신자들의 문제와는 다르다. 세속적 신자들이나 게으름뱅이 신자들의 문제는 세상과 게으름을 이기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열심 있는 신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모든 일을 하지 않고, 마귀의 말을 듣고 자기 방식대로 자기 힘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따르지 않고 마귀와 하나가 되어 이웃을 사랑하거나 선을 행한다면 그런 사랑과 선행은 하나님을 가장 교묘하게 모욕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남의 딸들을 꾀어 내어 윤락녀로 부리는 자가 그 딸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근본적인 경배는 죄에서 떠나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참 경배는 마귀를 거절하고 죄에 빠진 자기를 거절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붙잡는 것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히9:22)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죄를 버리고 거룩함을 입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각종 사상적 발명품이나 종교적 문화적 발명품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줄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것도 돌아보시지 않는다.
유다서 1:11은 이렇게 말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가인의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며, 마귀의 자극 아래 주제넘게 사람의 발명을 따라 자신의 방법과 노력에 의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수납되지 않고 거부될 때 분노하며 자기보다 의로운 다른 형제들을 괴롭히고 살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온 가인의 길이다.
아직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 주어야 할 말은 그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선한 사람들이나 자신이 선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더욱 이 말을 해 주어야 한다. "당신이 때로 선한 일을 했고 또 앞으로 더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마귀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마귀는 당신의 숨은 죄성과 욕망을 이용하여 언제든지 마귀의 뜻대로 당신을 이용할 수 있다. 심지어 당신이 선을 행할 때도 마귀는 당신 속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을 행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겉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 있는 이러한 속 모습을 보시기 때문에 결코 당신을 받아 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리스도의 피로 그런 자리에서 건짐을 받아야 한다."
유대교 안에 있을 때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결코 지지 않는 훌륭한 율법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받은 후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오직 죄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이 홀로 서 있는 것이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옷이 되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고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아름답고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발견되기를 원했다.
로마서 10: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가인의 추종자들이었다. 가인은 이런 모든 사람들의 선두 주자로서 '자기 의를 세우고 그리스도를 자기의 의로 취하지 않는' 불순종의 본을 남겼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무슨 선한 일이든지 하고 있다면 이것은 모두 가인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2.가인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의로운 자 아벨을 핍박함

하나님은 처음에 가인의 제사를 열납치 않으셨으나 그를 처벌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그를 찾아와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려 주셨다. 본래 가인의 행동은 부주의에서 나온 실수가 아니라 불신앙에서 불순종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처벌을 받아야 할 죄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권고하시며 돌이키려고 하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죄의 도전을 강하게 받고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죄를 이기라고 하셨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마귀가 삼킬 사람을 찾으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타락 후 인간은 마귀의 밥이 될 신세에 놓여 있다. 마귀는 사람을 움켜 삼킬 기회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비록 우리 자신이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죄가 우리에게서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사탄은 항상 사람을 노리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하며 죄와 싸워 이기지 않으면 결국 마귀의 밥이 되고 만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권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하나님께 대해 분을 품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열납된 아벨을 미워하여 죽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계속 자기의 길을 가려고 하다가 드디어 거짓말장이와 살인자가 됨으로써 자기 속에 감추어져 있던 마귀의 본성을 드러내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인류는 다 죄인이며 마귀의 사주를 받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실제로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마귀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죄인이니 마귀의 말을 들으며 범죄하고 살아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비록 한 번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살 길을 주셨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리고 발람이나 고라에게도 '너는 죄인이니 죄를 지으라'고 하시지 않고 '죄가 네 문 앞에 엎드려 있으나 너는 죄를 거절하고 싸워 이기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소수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인과 같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길을 걸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을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아벨을 시기하다가 결국 들판에서 둘이 있을 때 아벨을 죽였다. 여러분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것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짐작할 수는 있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이랬을 것 같다. 가인은 아벨을 만날 때마다 아벨로 말미암아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 하나님께 거부당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데 비해 아벨은 얼굴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숙이고 들었다는 것은 곧 그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탐욕과 불순종으로 인해 동요하고 평안을 잃어버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서 생명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있었다. 그것이 얼굴에 빛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가인은 이러한 아벨을 대할 때마다 자기와 비교되는 아벨의 모습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아벨을 죽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더라도 그들이 각기 다른 곳에 살든지 해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부딪힐 기회가 없었다면 살인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마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23: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마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마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23: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가인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가인의 길을 따르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가인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가인이 거짓말을 함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그를 찾아오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 가인 자신은 자기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자기는 이렇게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심지어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참담한 악인이 될 줄로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기대가 어떠했든지 그의 길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그 길의 결과를 맛보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이 선하므로 아무 문제가 없을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아무리 선해도 그 마음속에 악한 마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러므로 그의 선한 마음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오직 결과는 마귀의 일만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구도 마귀를 따라 살인자가 되고 거짓말장이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라 가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며 도덕과 윤리를 도모하며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그들의 원대로 되지 않고 있다.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각종 불법과 부도덕과 비인간적인 악행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겠는가? 나무에게서 열매가 결정된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3-12:35) 그러므로 가인의 길을 걸으면 가인의 행위, 곧 마귀의 행위만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인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가인은 거짓말을 했을 뿐 아니라 오만하고 패역한 모습을 함께 나타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했다.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사람 속에 작은 죄의 씨를 심었지만 이것은 그 때로부터 불과 얼마 안 지난 창세기 4장에 가서 벌써 이렇게 패역하고 사악한 열매를 나타내었다. 이 씨는 우리 모두 안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겉으로 친절하고 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으로 살면 반드시 어느 때에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의 씨로 말미암아 범죄하고 사악함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는 가인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철저히 그리스도로 사는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죄의 씨} 對 {여자의 씨}의 싸움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씨를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지금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여자의 씨로 해야 한다. 여자의 씨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을 말하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자의 후손은 모든 악의 근원인 악한 자, 곧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3:15) 여자의 씨이신 그리스도는 객관적으로 이 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했지만 지금도 주관적으로 그를 믿는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 우리가 여자의 씨를 주의하고 그를 의지하는 한 마귀는 우리를 손대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가 여자의 씨에 주의하지 않고 자신의 선한 마음과 생각을 따라 살면 마귀는 우리를 교묘히 조종하여 결국 우리를 거짓말장이와 살인자로 만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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